경산의 한 수험생이 실수로 다른 시험장을 찾았으나 원래의 시험장으로 돌아갈 시간 여유가 없어 그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렀다. 3일 경북교육청에 따르면 이 학생은 이날 오전 8시 20분께 경산고 시험본부에 와 자신이 시험장을 잘못 찾았다고 밝혔다. 이 학생이 시험을 치러야 하는 곳은 10㎞ 정도 떨어진 진량읍의 무학고였다. 시험본부는 경찰차로 학생을 호송하더라도 1교시 시험이 시작되는 8시 40분까지 무학고에 도착하기 힘든데다 그렇게 할 경우 학생이 불안해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예비시험실에서 이 학생이 시험을 치르도록 조치했다. 이에 따라 이 학생은 현재 예비시험실에서 혼자 시험을 치렀다. 수험생은 1명이지만 감독관은 규정에 따라 2명이 배치됐다. 경북교육청 관계자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 예비시험실을 마련토록 했는데 이번에 처음 적용됐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여파가 수능시험 고사장 앞에서 펼쳐지던 후배들과 가족들의 응원전도 사라지게 했다. 3일 수능이 치러지는 칠곡군 왜관읍 순심여고 정문 앞에는 학교관계자와 경찰관만이 자리를 지키며 수험생을 맞이했다. 형형색색 각종 플랜카드를 들고 교가와 응원가를 부르는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학교로 진입하는 주요도로와 골목에는 경찰관이 차량 진입을 통제해 수험생들은 차에서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고 수험장으로 걸어갔다. 또 시험이 끝날 때 까지 교문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부모님의 모습도 사라졌다.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칠곡군이 학교 주변에서 수험생 응원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백선기 칠곡군수는 “코로나19로 응원전은 사라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마음으로 전하는 응원은 더욱 뜨거웠을 것” 이라며 “최악의 여건에서 수능이 치러지지만 슬기롭게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꿈을 이루길 바란다”며 수험생을 격려했다.
수능일인 대구ㆍ경북지역 3일 아침기온이 예년보다 낮아져 수능한파가 예상된다는 기상청의 예보와는 달리 포근한 날씨 속에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전국 곳곳에서 치러졌다. 올해 수능 응시자는 49만3천433명으로 전국 1천383개 시험장에서 일제히 시험이 치러졌다. 이 가운데 대구는 49개 시험장에서 2만4천402명이, 경북은 73개 시험장에서 1만9천841명이 시험에 응시했다. 수능 응시자는 오전 8시10분에 입실완료해서 오후 5시40분에 시험을 마쳤다. 유례 없는 코로나19로 수능 고사장 분위기는 예상보다도 훨씬 더 차분하게 진행됐다. 응원금지 때문에 예전처럼 동사무소 직원, 출신학교 선후배, 각 학교에서 나온 선생님들의 응원, 현수막, 팻말, 봉사단체에서 제공하는 커피, 녹차, 엿, 찹쌀떡 등 그동안 흔히 고사장에서 볼 수 있었던 일체의 모습들이 사라졌다. 수험생을 태운 차량도 고사장 안에서 주차할 수 없기 때문에 수험생만 내린 뒤 부모들은 차안에서 격려의 말만 하고 곧바로 차를 돌려나갔다. 한 부모님은 차 안에서 “그동안 고생했다. 화이팅!”이라고 외쳤다. 중앙고 이 모 학생은 “편안한 마음으로 치겠다”라고 했고, 중앙고 김 모 학생은 “떨리지만 잘 치겠다”고 했으며, 예술고 신 모 학생은 “수시에 합격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치겠다”고 수능에 임하는 마음을 말했다.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한 학생은 “답답하고 힘들었다. 올해는 갇혀 있다 보니까 우울증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면서 “고려대학교를 목표로 하고 있다. 만점을 맞겠다는 마음으로 시험 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제철고 이 모 선생님은 “응원가지 말라고 했는데 제자이기 전에 자식 같은 마음, 부모님 같은 마음, 담임 같은 마음으로 얼굴한번 한 번 보고 들여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왔다”면서 “건강이 최우선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통제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낮선 것들이었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코로나로 힘들었던 한 해인데, 그래도 힘내자, 후회 없이 파이팅!”이라고 격려했다. 영신고 민 모 선생님은 “올해 코로나 때문에 학교 등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평상시 보다 잘 못했던 부분이 아쉽다.”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수능에 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동고 강 모 선생님은 “응원을 금지하라고 해서 선생님들이 나오지 못했다.”면서 “나는 응원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격려하러 나왔다”고 재치 있게 말해서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이어 “우리학교 제자들이 이 수험장에 많이 배치되어 격려차 나왔다. 올해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초반기 3·4월은 온라인 수업으로 우왕좌왕 했다. 야외활동, 체육활동 등도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이 묻혔다. 친구들 사이의 관계, 고3 담임의 입시지도, 입시설명회도 없어 깜깜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격수업이라는 것이 대면 수업보다 질이 훨씬 못하다. 그런 면에서 지도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올해 고생 많이 했는데 마지막까지 좋은 결과 낼 수 있도록 마음편안하게 자기실력 발휘했으면 한다. 올해는 수험생이 약 5만5천명 줄었다고 한다. 예년에 비해 대학가기가 쉬우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에 임해서 모두 원하는 대학갈 수 있도록 좋은 결과나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포항 개인택시 북부모범운전자 자원봉사자들은 “학생들이 드문드문 들어갔는데 100여명도 안 들어 간 것 같다. 학생들이 많이 줄었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 비해 너무 차분하다”고 말했다.
계림고등학교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장인 포항 남구 영일고등학교에 수험생들이 들어가고 있다.
경주경찰서는 3일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맞아 경찰관 65명, 모범운전자 14명을 동원해 시험장 주변 교통혼잡방지 및 소통관리에 주력했다. 이날 오전 6시부터 경주시 7개 시험장 주변과 주요 교차로에 경찰력을 배치해 교통소통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경주역과 시내버스터미널을 수험생 태워주기 장소로 지정하고 순찰차를 대기시켜 입실시간이 임박한 수험생을 대상으로 긴급수송 서비스를 제공했다. 경찰은 이날 오전 6시45분께 계림고 시험장에 택시를 타고 도착한 수험생 이모 군이 휴대폰을 택시에 두고 내린 것을 확인하고 택시회사와 연락해 찾아줬다. 또한 오전 7시34분께 시험장을 잘못 찾은 수험생 이모 군과 오전 8시2분께 수험생 정모 군을 경주고에서 약 6.7km 떨어진 문화고까지 순찰차로 긴급 수송해 안전하게 시험장에 입실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물이 태극형으로 도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 하회마을은 산과 물이 곱고 경치가 빼어나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살기 좋은 냇가 마을로 손꼽았다. 이 마을의 충효당(보물 제414호) 뜰에 있는 대나무의 잎을 보고 나서 눈을 감으면 거기서 이는 맑은 바람과 시원한 그늘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리고 그러한 바람과 그늘이 있는 서쪽 언덕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맑은(淸) 바람과 시원한 그늘(陰)은 ‘청음(淸陰)’이란 호를, 서쪽(西) 언덕(厓)은 ‘서애(西厓)’라는 호를 생각나게 한다. 청음은 김상헌(1570~1652), 서애는 유성룡(1542~1607)의 호다. 전자는 병자호란, 후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인물이다. 둘의 공통점은 외세가 끝내 정복할 수 없었던 ‘겨레의 불굴의 혼’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애 종택인 충효당의 댓잎에서 청음이란 호가 생각나게 된 것은 아마 무의식 속에 이러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음이란 호가 먼저 생각났으니, 생각이 흐르는 대로 청음에 대한 얘기부터 먼저 해본다. 청음의 손자인 곡운 김수증(1624~1701)은 화산기라는 글을 남겼는데, 거기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저녁에 소산에 도착해서 곧바로 삼구정에 갔다. 정자 앞에는 교목 한 그루가 있었다. 세 개의 거북돌은 우뚝하지만 오래된 소나무는 거의 다 꺾이었다. 곧장 옛날 지내던 집으로 들어가니, 나무가 썩고 기울어 거의 지탱할 수 없었다. 동쪽 각 몇 칸은 서윤 선조께서 독서하셨던 곳인데, 우리 형제가 이곳에서 책을 읽었다. 작은 방은 할아버지께서 거처하셨던 곳인데, 지금은 하인이 지키며 살고 있었다. 방과 뜨락은 황폐해져 발붙일 곳도 없었다. 집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대추나무 한 그루가 옛날 그대로 있었다.” 이 글 속에는 소산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는 ‘옛날 지내던 집’이 있다. 그 집엔 ‘작은 방’이 있고, 거기서 ‘할아버지’께서 거처하셨다. 여기서의 ‘할아버지’는 청음이고 ‘옛날 지내던 집’은 원래 청음의 증조부인 김번이 관직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낸 곳인데, 청음이 기존건물을 누각식으로 중건하고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 지은 것이다. 이 집은 17세기라는 시대성과 향촌사회 유력가문이라는 계층성이 반영된 건축 형태를 보이고 있음과 동시에 청음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강직한 성품이 조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어 2019년 12월 30일 보물 제2050호로 지정되었다. 연보에 의하면 청음은 두 차례에 걸쳐 총 7년 동안 안동에 머물렀다. 첫 번째는 1618년 2월 부친상을 당하고 부인과 함께 낙향하여 1621년 봄 양주 석실로 돌아갈 때까지의 만 3년간이다. 두 번째는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로서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가 척화를 주장하다가 최명길이 “조선국왕은 대청국 인성황제에게 말씀 올리나이다.”로 시작하는 항복문서를 쓰기에 이르자 그것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는 등 화친을 극력 반대하였음에도 끝내 항복이 정해지매 6일간 단식 후 스스로 목매어 목숨까지 끊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37년 2월 7일 남한산성의 동문을 나와 안동 서미로 내려왔다가 곧 소산으로 거처를 옮긴 뒤 1640년 11월, 명나라를 치는 데 군사를 보내라는 청의 요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하여 청나라 심양에 끌려갈 때(이때 지은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는 너무나 유명하여 상술을 생략한다.)까지의 약 4년간이다. 안동에 머무는 동안 청음은 금산촌(金山村)이란 지명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어 온당치 못하다며 소산촌(素山村)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으며, 시조 산소 찾기와 제례정비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서미와 소산 두 곳에서 강학을 하였는데, 손자 김수증(당시 14세) · 김수흥(당시 12세) · 김수항(9세)과 삼종질 김진원 · 김희진 등 일족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배움을 구하여 모여들었다. 이들 가운데서 손자 셋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김수증은 공조참판, 김수흥과 김수항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김진원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개성경력을 지냈고 전적으로 있을 때 심기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어 영국원종공신 일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삼구정에 올라 풍산들을 바라보며 시를 짓곤 하였는데, 〈삼구정팔경〉은 그 중의 하나다. 그가 노래한 삼구정 팔경은 학가산의 비갠 봉우리(鶴嶠晴峯), 마애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馬崖峭壁), 현리의 자욱한 꽃(縣里烟花), 역동의 겨울 소나무(驛洞寒松), 넓은 들판 가득 누렇게 익어가는 벼의 모습(長郊觀稼), 굽이도는 물가에서 고기잡이하는 풍경(曲渚打魚), 삼복더위의 피서(三伏避暑), 한가위에 바라보는 달(中秋翫月) 등이다. 그는 청에 대한 조선의 굴욕적인 항복에 대한 회한의 정을 씻을 수 없어, “나라는 다 깨진 뒤 몸만 남쪽으로 내려와/ 사람 만나 당시 일 말하려니 부끄럽기 한이 없네./ 사립문에 기대어 새로 뜬 달 바라보노니/ 산중에 있는 이 늙은이의 마음을 그 누가 알랴.”라는 시를 이 시기에 짓기도 하였다. 1640년 심양으로 압송되었다가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뒤 석실로 낙향하여 은거한 그는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는 추앙을 받았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효종의 묘정에 종묘 배향되었다. 저서에 《야인담록(野人談錄)》 《독례수초(讀禮隨)》 《남사록(南錄)》 《청음전집》 40권 등이 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인물로 덕으로는 퇴계 이황, 전략으로는 충무공 이순신, 절의로는 청음 김상헌을 꼽았다. 이 가운데서 절의의 표상인 청음 김상헌은 청 태종이 끝내 정복하지 못한, 조선의 마지막 영토였다. 그 굴하지 않는 혼은 외세의 끊임없는 바람에 부대끼는 겨레의 마음속에서 민족자존의 올곧은 대나무가 되어 영원히 푸르게 살아 있을 것이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재상으로, 국보 징비록의 저자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러한 그와 관련된 다음의 일화는 멸망의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려는 조선을 붙잡은 역사적 사실이자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서애의 나이 51세가 되던 1592년 4월에 일본 군사가 대거 조선에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이일, 신립 등 여러 장수를 남쪽으로 파견하여 방어케 하였다. 그러나 신립의 충주 패전으로 도성이 위태로워지자 신하들은 왕인 선조를 모시고 북으로 피란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을 떠나 개성으로 향했다. 5월 1일 개성에서 난국 타개를 위한 조정 회의가 열렸는데, 신하들은 한결같이 명나라에 빌붙거나 함경도로 피란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때 서애는 “임금께서 우리 땅을 단 일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우리 국토를 지키면서 의병의 궐기를 촉진시켜 왜를 몰아내자고 역설하였다. 그 뒤 선조는 압록강 근처로까지 몽진하였는데 그때 명나라로 망명을 할까 말까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도 유성룡은 “임금께서 우리 땅을 단 일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안 될 것입니다.”라는, 마음속 깊이 있는 말을 절실하게 하였으리라. 전란의 체험을 읊은 그의 장편 고시인 〈감사(感事)〉에서 그는 그때의 일을 “압록강 맑은 물 두루미 날갯짓처럼 넘실거리고(鴨水淸彌彌)/ 요동의 산 눈에 또렷했네(遼山明刮目)/ 그 때의 심한 낭패감(當時狼狽甚)/ 차마 말하기 어려운 일이었네(事有不忍說)”라고 읊었다. 어가가 서울로 동아온 뒤인 1593년 10월에 그는 영의정이 되었고, 그에게는 전란 수습의 큰 임무가 주어졌다. 그는 관서도체찰사·호서호남영남의 삼도 도체찰사의 임무를 겸하여 띠고 외교·군무·민정 등에 걸쳐 종횡무진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며 국난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598년 11월 19일, 마침내 칠 년간의 왜란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기도 한 이 날,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에 대하여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그는 영의정에서 파직되고 모든 관직이 삭탈되어 낙향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직책을 내려 불렀지만 매번 상소문을 올려 사양하고 다시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낙향 후 그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저술 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가 남긴 저서에는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 《서애집(西厓集)》, 《난후잡록(亂後雜錄)》, 《진사록(辰巳錄)》, 《근폭집(芹曝集)》 등이 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을 통해 본 그의 시문은 전아청결(典雅淸潔)하고, 그의 산문은 실학파 문장의 선구자 구실을 하였다. 특히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은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학문은 퇴계의 성리학을 이었으되 그것의 규범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적 학풍을 지녀 17세기 초기 실학사상과 연결된다. 그의 학통은 안동의 병산서원·상주의 도남서원·군위의 남계서원·의성의 빙산서원·용궁의 삼강서원을 중심으로 이어졌으며, 정경세·이준·김식·김봉조 형제·김태·김윤안 형제· 장흥효·권기·홍위·이민환·정윤목·조형도·노경임·이보·조익·이형남·유진·정도응·유원지·홍호·조광벽·정영방·홍여하·유세명·유규·유종로·유심춘·유주목 등이 그의 학맥을 이었다. 그는 1605년(선조38)에 풍산군 서미동으로 이사한 다음, 이듬해에 자그마한 초당을 짓고 농환재라고 이름 지어 살다가 1607년(선조 40) 5월 6일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살아생전에 그의 제자였던 김태(1561 ~ 1609, 자는 사열이고 임진왜란 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승정원좌승지의 증직을 받았음)와 김윤안(1562 ~ 1620, 자는 이정이고 대사간을 지냈음)이 퇴도 선생 연보를 편차하기 위하여 옥연서당에 가 있었을 때 병들어 만나지 못하고 절구 네 수를 써서 보내었는데 그 중의 한 수가 떠오른다. “어스레하게 저무는 산에 구름 일고 (薄暮山雲起)/ 한밤중 물 가운데는 달도 밝구나(中宵水月明 )./ 외로운 집에 베개 높이 베고 누웠으니(一軒高桃臥)/ 많은 대나무 바람에 씻겨 깨끗도 하네(萬竹受風淸).” 그는 조선 시대 양대 전란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이라는 눈보라 속 어둠을 헤쳐 온 ‘한밤중 물 가운데의 달’이었다. 후손과 문하생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집인 충효당의 뜰에는 ‘바람에 씻겨 깨끗한 대나무’가 있고, 그 대나무의 잎을 보고 나서 눈을 감으면 거기서 이는 맑은 바람과 시원한 그늘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리고 그러한 바람과 그늘이 있는 서쪽 언덕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안동시내에서 풍산 방향으로 가면 서의문을 만나게 된다. 이 서의문을 앞에 두고 오른편으로 가면 송암구택과 학봉종택을, 왼편으로 가면 청성산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서의문에서 5킬로미터 이내의 거리에 있다. 서의문을 앞에 두고 좌측으로 1.5킬로미터쯤 가면 왼편에 낙동강이 흐르고 오른편에 산이 하나 솟아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오른 편에 있는 이 산이 청성산이다. 송암은 이 산을 “마치 큰 거북이 바다에서 몸을 솟구치며 머리를 들고 서 있는 듯하다.”고 〈성산기(城山記)〉에서 말하고 있다. 이 청성산 기슭, 낙동강이 굽어보이는 곳에 연어헌(鳶魚軒)이 있다. 송암이 그의 나이 43세 되던 해인 1574년에 지은 정자이다. 〈시경(詩經)〉의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魚躍于淵)’라는 구절에서 ‘연어’ 두 글자를 취했다고 〈연어헌기(鳶魚軒記)〉에는 적혀 있다. 이 연어헌에는 주세붕이 한자로 쓴 편액과 이동환이 1778년에 한글로 쓴 편액이 정면에 걸려 있다. 그리고 1570년 11월 8일 퇴계가 운명하기 한 달 전에 지은 〈성산에 오르다〉란 시(“절은 산 높은 곳에 있고 멀리 강물이 흐르는데(蘭若山高水逈臨)/ 흰 구름과 푸른 대나무 찾아 유람하기에 좋구나(白雲靑竹好遊尋)/ 오십 년 전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마는(誰知五十年前事)/ 사무쳐 시 지으니 생각을 금할 길 없네(感慨題詩思不禁)”)를 새긴 시판이 걸려 있다. 퇴계는 송암이 태어나기 전인 1520년께 성산사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병석에서 50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이곳에서 처사의 삶을 사는 송암에게 이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송암의 어머니는 퇴계의 맏형 이잠(李潛)의 딸로서, 퇴계는 송암의 외종조부가 되는 관계에 있다. 연어헌의 왼편에는 진원사라는 굿당이 있고, 연어헌과 진원사 사이에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나 있다. 이 오솔길을 따라 가면 청성산의 내밀한 곳을 만날 수 있다. 그 내밀한 곳에 고려 시대에 지은 성산사라는 절의 터가 있다. 이 절터 위에 세워져 있던 절, 즉 성산사에 송암 권호문(1532 ~ 1587)과 학봉 김성일(1538 ~ 1593)이 과거공부를 하러 들어간 적이 있다. 송암이 퇴계의 가르침을 받은 지 22년(송암의 나이 37세), 학봉이 퇴계의 가르침을 받은 지 12년(학봉의 나이 31세)이 되던 해인 1568년이었다. 그때 둘은 “올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청성산의 주인이 되자.”고 약조를 하였다. 그런데 학봉은 급제하고 송암은 낙방하고 말았다. 송암은 약조한 대로 청성산의 주인이 되는 길을 걸음으로써 김부필, 이숙량과 함께 계문삼처사(溪門三處士, 퇴계 문하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산 세 선비)의 한 사람이 되었고, 학봉은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벼슬길에 오른 학봉은 유성룡과 함께 군정의 개혁을 통해 유비무환의 태세를 갖추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590년 3월 통신사 부사 자격으로 정사 황윤길, 서장관 허성 등과 함께 이듬해 2월까지 1년 동안 일본에 다녀와서 복명을 하였다. 그런데 정사와 부사의 복명 내용이 전혀 딴판이었다. 황윤길이 ‘필히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자, 학봉은 자신은 ‘병란의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이니 내치에 힘쓰라’고 반박했다.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조정은 그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김성일의 복명에 의심을 품은 선조는 왜란 발발 직전 조정의 중신이었던 그를 외직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했다. 이어서 1592년 왜란이 발발하자 국사를 그르친 죄인이라 하여 죽이려 했지만 동인인 유성룡의 변호로 마지못해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했다. 그 뒤 그는 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다가 진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전란 중 그는 적극적으로 민심을 규합하고 통합과 조정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왜군의 후방을 교란시킴으로써 조선의 멸망을 막아낸 일등공신이 되어 사후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그 공이 허물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평가하는 사가들이 적잖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가 부각되어 후세인에게 ‘역사의 죄인’으로 각인되는 불우한 인물의 대명사가 되고 있기도 하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례고증》·《해사록》·《학봉집》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이황의 《자성록》·《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한 학자로서 호계서원 등 여러 곳에 제향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청성산의 주인이 되기로 한 송암은 청성산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며, 새벽마다 책을 읽으며 후학을 양성하면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다. 그리하여 《송암선생문집》·《송암선생속집》·《송암별집》 등 14권 5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이 방대한 글들은 대부분 한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락팔곡)〉(경기체가의 마지막 작품)·〈한거십팔곡〉(연시조) 등의 국한문 혼용체 작품도 있다. 이들 작품은 모두 퇴계의 훈도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다음의 일화는 그 훈도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의 나이 25세에 청량산을 유람하고 나서 108운의 장시를 지어 스승인 퇴계에게 올렸다. 퇴계는 시를 정독한 뒤 이렇게 말했다. “시를 자세히 보니 병폐가 적지 않다. 말을 길게 하고자 한 까닭에 지리하고 산만하게 되었다. 운을 가득 채우려고 어려운 운자를 끌어대다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전고를 인용함에 어떤 것은 타당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다. 대구를 이룬 것도 어떤 것은 적합하고 어떤 것은 군더더기다. 많은 것에 힘쓰다가 번잡하게 되는 것이 어찌 간략하고 정당(精當)한 것만 하겠느냐. 멀리 가자고 자주 넘어지는 것이 어찌 궤도를 따라 홀로 이르는 것만 하겠는가.” 퇴계로부터 송암이 이러한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은 공자가 학문에 뜻을 둔 나이인 15세 때부터였다. 이후 퇴계가 별세할 때까지 24년이란 세월 동안을 그는 퇴계를 곁에서 모시고 이러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 만큼 그는 퇴계를 속속들이 배워 알게 된 제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퇴계는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으로 부르며 틈만 나면 들러 시를 짓고 제자들과 문답하곤 했다. 그 결과 청량산은 ‘퇴계의 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퇴계의 제자로서 퇴계의 이러한 점을 본받아 청성산에서 퇴계와 같은 삶을 삶으로써 청성산이 ‘송암의 산’으로 불리어가고 있을 즈음에 송암은 정탁으로부터 벼슬길에 나오라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독락팔곡〉을 지어 사양의 뜻을 나타냈다. 또 이조참판 구봉령이 품계를 올려 천거하자 〈한거록〉을 보이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동문수학한 서애 유성룡은 그러한 그의 뜻을 알고 그를 ‘강호고사(江湖高士)’라 부르며 천거하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청성산의 주인이 되자’고 학봉과 약조한 지도 17년이 지났다. 1585년 어느 날 학봉은 “청성산의 절반을 저에게 기꺼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송암에게 보냈다. 송암은 이를 받아들여 산의 절반 중 윗부분을 그에게 주었다. 그 이태 뒤 학봉은 그곳에 석문정사를 세웠다. 이렇게 하여 청성산의 주인은 송암과 학봉, 두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학봉은 청성산의 주인으로서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려보지도 못한 채 벼슬살이를 하다가 병사하였고, 송암은 청성산에 들어 살았지만 현실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축묘설(畜猫說)〉이란 글을 남겼다. 그 내용은 이렇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자 쥐떼가 곡식을 훔치러 벽을 뚫는 것을 보고 더는 그냥 둘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이웃집의 작은 고양이를 데려와 사랑으로 길렀다. 고양이는 두서너 달이 지나자 큰 쥐를 잡는 꾀를 알아냈다. 아침에는 담장 구멍 곁에 있고 저녁에는 항아리 사이를 엿보다가 반드시 쥐를 잡은 뒤에야 만족했다. 나라에서 벼슬하는 자들이 도성의 여우와 사직의 쥐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세상 사람들 중에는 쥐와 같은 자가 많다. 임금이 준 관복을 입고 임금이 준 곡식을 먹으면서 직분을 다하지 않는 자들은 어찌 내가 기르는 고양이에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송암은 이러한 사상과 퇴계로부터 물려받은 학문을 후학들에게 물려줌으로써 그의 뜻을 실현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36세 무렵에는 하연, 권기, 박경중, 진종주, 금관조 등의 제자를 두게 되었고, 48세 이후에는 병산서당, 경광서당, 여강서원, 청성정사 등지로 강학의 폭을 넓혔다. 이 결과 그의 사후인 1608년엔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하는 문하생과 사림의 발의로 연어헌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에 청성서원(靑城書院)이 세워졌다. 서원 오른쪽에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 ‘청풍사(淸風祠)’가 있고, 사당 뒤쪽 산중턱에 그의 묘소가 있다. 그가 태어난 집인 송암구택에는 오른쪽 사랑채 안에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중의 하나인 관물당이 있다. 관물당은 송암이 이름 붙인 ‘관아당(觀我堂)’을 보고 퇴계가 고친 뒤 직접 써준 이름이라 한다.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 대상을 눈으로 보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만 못하며, 마음으로 보는 것은 이치로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관물당 앞에 서면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 부사로 일본을 다녀 온 학봉의 복명 장면이 떠오른다. 그도 퇴계로부터 대상을 이치로 보아야 한다고 배웠을 텐데, 어떤 이치로 대상을 보았기에 그의 눈에 보인 대상이 이토록 실상과 달랐단 말인가? 그의 이치는 물론 퇴계로부터 배운 성리학적 이치였을 것이다. 이 세계는 형이상지도(形而上之道)인 이(理)와 형이하지기(形而下之器)인 기(氣)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가 발하면 기가 따르고 기가 발하면 이가 올라탄다는 유의 이치였을 것이다. 그런 이치로 그가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관념이었다. 이치라고 하는 관념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한계인 동시에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하고 있던 조선의 한계였으리라. 조선이 생존하고 발전하려면 이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다. 그러려면 사물을 관찰함에 있어 기존에 이치라고 믿고 있던 관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다 세밀히 보고, 거기서 이치를 발견해내는 방법을 취했어야 했다. 그러했더라면, 조선의 성리학은 과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풀벌레를 살리는 것은 풀잎이지 관념이 아니라고 외치는 듯하다. 풀잎이 싱그러운 산이 그립다. 청성산에 오른다.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저 멀리 안동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산정 주인금난수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하고 보면 아래로는 조목의 월천 서당이 있고 위로는 청량산 가까이 고산정이 있다. 두 곳 모두 도산구곡의 절경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나 월천 조목은 자신의 호에서 말해주듯 월천리, 다래에서 태어났고 성성재 금난수는 도산구곡중 제3곡인 오담에서 태어났다. 금난수(1530-1604)는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고산주인(孤山主人)으로 월천 조목과는 처남 매부지간이다. “금난수가 자랐던 마을 가까이 있던 부라원루 앞 강변에는 성재가 심은 소나무가 있는데, 월천은 이 솔밭을 ‘사평송’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성재는 일찍이 청계(靑溪) 김진(金璡)에게 수학하면서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구봉령(具鳳齡), 이국량(李國樑) 등과 교유를 맺고 서로 강론하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었으며, 처남 조목과 함께 『심경(心經)』, 『주서(朱書)』,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의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데 정진하였다. 이후 퇴계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유학자로서의 자질을 더욱 높여나갔다. 『심경』은 금난수가 평생 동안 가장 심복한 책으로써 이황으로부터 직접 전수를 받아 강학에 힘쓴 책이었다고 전해진다. 금난수는 손위 처남인 조목의 권유로 퇴계 선생의 제자가 되었으나 여기에 일화가 있다. 제자 되기를 몇 번이나 청했으나 퇴계 선생은 점점 쇠약해지는 신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그러나 금난수는 오랜 나날에 걸쳐 퇴계 선생을 찾았으니 마침내 허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하에 들어간 후 성재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에 골몰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을 하며 자책하는 것을 보고, 퇴계 선생은 성재를 위한 시를 지어 학문 수양에 정진할 것을 격려 했다고 한다. 성재는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또 <성재일기>에는 같은 해 4월 남명 조식을 만난 일화를 기록해 놓았다. 1577년(선조 10) 제릉참봉을 비롯하여 몇 몇의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599년 봉화현감에 임명되었다. 문집으로 『성재집(惺齋集)』이 있는데 시, 서(書), 잡저, 부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권3에 있는 「도산서당영건기사(陶山書堂營建記事)」에는 도산서당 건립시의 전말이 상세히 기록되어 전한다. 성재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글귀가 있다. 월천이 퇴계로부터 받은 편지를 가려서 책으로 묶은 ‘사문수간(師門手簡)’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월천이 37세 때, 금란수와 함께 퇴계를 모시고 오담烏潭에서 뱃놀이를 할 때의 일이다. 오담 소沼의 이름을 고치는 문제로 퇴계와 금란수와 몹시 다투었다. 발단은 퇴계가 ‘오烏’자가 아무 근거 없이 붙었다는 말을 듣고 새롭게 ‘풍월담風月潭’으로 고치자고 제안하자, 월천이 “어찌 다시 (제가 소유한) 이 소沼마저 가지시려고 하십니까?” 하며 거칠게 항의했다. 퇴계는 말없이 돌아갔고 이 일에 대하여 곧 편지를 보내왔는데 편지 내용은 이러하다. - “어제 배 위에서 한 말과 그대의 얼굴을 살피니 나의 제안은 조금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사람 기질의 약점은 강함[剛]과 유약함[柔]에 많이 나타난다. 내가 보니 두 사람 모두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도 약점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쓸데없는 객기로 다투기만 하네. …… 바로 말하면 금군(琴君)은 비록 유柔함에 가까우나 유연한 데는 이르지 못하며, 가끔은 바름에 이르려고도 하네. 그런데 그대는 강하다고 자부하나 굳건함에는 이르지 못하며, 도리어 몹시 사납고 조금도 겸손함과 공손함이 없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일 뜻이 없어 보이네. 그러니 덕을 해치고 일에 방해됨이 금군의 행위보다 여간 심한 것이 아닌가”-. 하고 두 사람의 행동에 대한 간접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퇴계 선생의 교육 방법이 드러나 있다. 성재 금난수의 종택은 안동댐 건설로 옮겨져 지금의 예안면 부포리에 있으며 그의 묘소는 안동시 도산면 단천리에 있다. 성재는 사후에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제향 되었다. 8곡에 자리한 고산정 성재 금난수를 거론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산정이다. 원래 일동정사(日東精舍)였다. 도산구곡의 제8곡이요 안동팔경(安東八景)의 하나인 가송협(佳松峽)의 절벽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여름날 비가 그친 뒤 병풍처럼 둘러선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內屛山)을 안개가 감싸고 있는 정경은 마치 신선의 세계라 일컬을 절경이다. 1554년(25세)에 부포에 성재라는 정자를 짓고, 1563년(35세)에 가송협에 고산정을 지었다. 성재의 연보에는 “가을에 일동정사를 지었다. 바로 고산정이다. 치솟아 있는 절벽을 끼고 깊은 물웅덩이를 내려다보니, 수려하고 깊고 그윽하여 선성 명승 중의 하나이다.로 나타나 있다.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뒤 정자를 지었는데 물과 바위와 주변의 산과 숲이 어우러져 자연의 질서를 조화롭게 연출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앞에 물가에 약간은 휘어지고 오래된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 주고 있다. 물을 건너가기 전 맞은 편 강둑에서 바라보는 고산정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러한 고산주인의 정자의 아름다움에 취해 시인 묵객들이 내왕이 잦았다. 청량산을 자주 찾았던 스승인 퇴계 선생도 길목에 있는 이 정자에 시 한 편을 주저하지 않으셨으니 시 ‘서고산벽(書孤山璧)이 있다.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日洞主人琴氏子(일동주인금씨자)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隔水呼問今在否(격수호간금재부)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耕夫揮手語不聞(경부휘수어불문)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愴望雲山獨坐久(창망운산독좌구) 산수화 한 폭을 떠올린다. 성재를 찾는 퇴계 선생의 모습과 못들은 채 밭가는 농부 그리고 구름 걸린 산을 보며 기다리는 퇴계 선생. 시 한 수에서 탈속한 은사들의 유유자적하는 삶과 고상한 기품을 느낀다. 성재 금난수도 고산정에서 독서를 하고 자연을 즐기는 가운데 여러 수의 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한 수를 보면 천 길 벼랑 아래 아름다운 그대는 遙憐絶壁千尋下(요련절벽천심하) 강가의 띠집에서 옛 책을 읽는다지. 茅屋臨流讀古書(모옥임류독고서) 조용한 가운데 공부는 잘되고 있는지 靜裏工夫能會未(정리공부능회미) 책 가운데서 느끼는 참맛은 어떠한가. 書中眞味問如何(서중진미문여하) 자문자답하는 형식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일동정사에서 독서를 하고 자연을 즐기는 자신을 스스로 독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예로부터 정자는 선비들이 학문을 수양하고 교유하는 장소로서 애용되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뤄서 심신 수양의 거처로서 높이 평가 되었던 것이다. 고산정을 널리 알린 이는 퇴계 선생일지 모르다. 청량산을 오르내리며 제자의 정자를 가끔씩 찾는 스승의 발걸음에서 한 편의 시가 나오고 거기에 연이은 제자들과 묵객들의 숱한 방문으로 차운을 한 수백 편의 시들이 전한다. 계절 따라 느끼는 자연의 감흥이 같을 수는 없다. 강을 건너 찾아든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보는 경치도 어디 비할 데가 없다. 맞은편에도 솔숲이 우거진 작은 산이 예쁘게 솟아 있고, 강물은 오늘도 도산구곡 예던길을 또 굽이쳐 흘러간다. 조금은 굽은 소나무가 그렇게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며 서있다. 옛날의 정자 주인과 이곳을 드나들던 숱한 유학자들의 발걸음을 떠올리듯이.
도산구곡의 마지막이 청량산. 산의 기운을 담아 이 골 저 골을 씻듯이 흘러내려 휘돌아 흐르는 물이 한 곳에 이르러 알프스 못지않은 감탄의 절경을 빚어내니 바로 가송협이다. 산세와 물이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곳에 조물주는 절벽을 둘러두고 여기에 마땅히 어울리는 정자하나 두었으니 바로 고산정이다. 정자 주인은 성재 금난수이다. 가송을 지난 물이 단천을 거쳐 온갖 모양새로 흘러 40여 리 아래쪽 지금의 도산서원 앞을 지나 넓디넓은 부포들을 적실 즈음 달애에 이르러 아담한 서당 하나 두었으니 월천서당이다. 월천 조목이 후학을 기르던 곳이다. 고산정이나 월천서당은 도산구곡 가운데 8곡과 2곡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의 일화 속에 자주 언급되는 곳으로 주인공 두 분 모두 퇴계 선생이 아끼던 제자로서 월천 조목은 성재 금난수의 손위 처남이다. 두 사람은 여섯 살 차이의 처남 매부 지간이지만 살아온 행장을 살펴볼진대 상통하는 점이 너무나 많다. 퇴계의 애제자 월천 조목은 조선 중종 19년(1524) 예안현 월천리에서 태어났다. 지금 이곳은 안동댐으로 대부분 수몰 되고 마을 뒤쪽의 부용봉 기슭에 월천서당이 아직 남아 있어 옛 마을의 위치를 짐작케 한다. 월천리는 도산구곡에서 두 번째 곡이다. 서당이 있는 곳에서 물 건너 부포 마을이 마주보이는 절경이다. 그의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월천(月川) 또는 동고산인(東皐山人), 부용산인(芙蓉山人)이라 하였고,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그의 호가 ‘월천’이 된 것도 그가 나서 자란 곳일 뿐 아니라 일생의 생활 근거지였던 이곳의 지명을 취한 것이다. 조목은 5세에 처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12살이 되던 해 이미 경전을 독파했고, 15세때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다. 이때 퇴계 선생은 38세로 정6품의 지위에 있었다. 당시에 퇴계 선생은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월천리는 퇴계의 고향인 온계와 가까웠기 때문에 그는 이를 계기로 퇴계와의 끊임없는 교류를 계속하여 조목은 학문에 정진 수양하는 처사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조목은 명종(明宗) 7년(1552)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그러나 진작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45차례에 걸쳐 재수되었으나 대부분은 부임하지 않아 40여 년 동안 실제 봉직한 기간은 봉화현감과 합천군수로 있었던 기간인 4년 남짓할 정도였다. 학문에 대한 정진의 자세는 그의 일생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21세 당시에는 풍기 군수로 재직하면서 백운동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고 이 고을 향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이후 26세 되던 해인 1549년(명종 4년) 당시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자 역시 찾아가서 배움을 청하고 백운동서원에 머물며 공부를 했다. 당시 이웃 고을에서 향시가 있어서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가려고 하지 않자 그 연유를 물으니 조목은 “본래 독서를 하고자 공부를 한 것이지 문장을 지으려는 게 아니었습니다.”고 했다. 이에 퇴계가 독서가 근본임을 말하자 “학문함에 독서에 전념하지 않으면 마땅히 사우(師友)와 더불어 견문을 통한 배움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고 했다고 한다. 29세에는 현사사라는 절에서 동문수학하던 권대기ㆍ김팔원ㆍ구봉령ㆍ금난수 등과 함께 경서강독을 위한 독서를 위한 계를 만들었다. 이때 “.우리 친구들이 바쁘게 모이고 헤어지느라 서로 강론하며 절차탁마하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제 매 계절마다 혹은 산사에서 혹은 정사처럼 조용하고 가까운 곳을 찾아서 경사(經史) 서적 중의 하나를 택해 가지고 와서 통독하기로 한다.”는 등의 규약을 정하기도 하였다하니 학문에 대한 열의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조목이 퇴계 선생의 애제자로 불리어지는 까닭은 ‘월천선생문집’이나 사제 간에 주고 받은 편지 모음인‘사문수간(師門手簡)’에 잘 나타나듯이 그가 일생동안 가진 퇴계 선생과의 남다른 숱한 학문적 교유에서 드러난다. 도산서당에 유숙하면서 경학을 논하고 강론과 필사를 하였으며 퇴계 선생을 모시고 가까운 산천의 승경을 유람하기도 하고 , 심경(心經)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 대한 강론을 펼치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독조동에 청원대라는 정사를 축조하기도 하고 경전의 주석에 대한 질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40세 되던 해에 조목의 집안에 양식이 떨어졌는데 퇴계 선생이 이 소식을 들은 퇴계 선생이 양식을 부쳐왔다. 이러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하니 스승의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유는 퇴계 선생이 1570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목은 스승이 남긴 학문적 유업을 더욱 현창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안동 지역 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을 창건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금난수와 더불어 서원을 지을 터를 지정했으며, ‘역동서원사적’(易東書院事蹟)을 짓고 우탁 선생을 서원에 봉안하였다. 봉화현감으로 재임 시에는 봉화향교를 옛 터에 회복 중수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난 이후 조목 역시 후학 유생들에 대한 경전을 강의 하거나 청량산을 제자들과 함께 유람하고 월천서당, 도산서원, 역동서원 곳곳에서 ‘심경’에 대한 계몽 활동을 이어나갔다. 조목이 생전에 편집하고 간행하거나 서술한 주요 문집으로는‘주자대전(朱子大全)’을 초록해서 엮은 ‘주서초 (朱書抄)’와 선현들의 말씀을 가려 실은 ‘곤지잡록(困知雜錄)’을 엮고, 61세 되던 해에는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을 엮었고, 퇴계 선생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아 8권으로 된 ‘사문수간(師門手簡)’을 엮었다. 이외에도 ‘한중잡록(閒中雜錄)’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서책을 편찬해 내면서 스승의 유업을 잇는데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뿐만 아니라 조목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동생 및 두 아들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와 합세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하는 데 공헌을 했다. 1594년(선조 27) 군자감 주부를 제수하자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 선조가 의주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듣자 광현에 올라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향중인사들과 상의하여 식량과 병사를 모아 적을 토벌했는데 김해(金垓)에게 그 일을 통괄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의 의병활동 상황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는 『임진왜변일기 壬辰倭變日記』 기록을 조목이 남겼다고 한다. 동계 정온(桐溪 鄭蘊)은 조목의 신도비문에 “본래 벼슬에 뜻이 없어 해매다 임명하고 달마다 옮겨 40여 관직에 이르렀으나 취임한 적이 얼마 없었으며, 혹 나갔다 해도 또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모두 여덟 번 수령에 임명되었으나, 다만 봉화ㆍ영덕ㆍ합천에만 부임하였고, 그것도 곧 버리고 돌아왔다. 늘 호문정(胡文定)의 ‘차고 덥고 주리고 배부른 것은 스스로 짐작해 알아야 한다.’는 말로 스스로 경계하여 나아가기를 어렵게 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함이 이와 같았다.”고 하여 그의 삶에 대한 자세를 짐작할 수 있으며, “선생의 아름다움 품성은 퇴계를 만나서 완성되었고, 퇴계의 도학은 선생을 얻고서야 빛을 발하였다. 선생이 아니라면 누가 퇴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퇴계가 아니라면 누가 선생의 깨달음을 간직할 수 있게 이끌어 주었겠는가!”하고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후세 사람들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달애의 월천 서당 월천서당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이 중종(中宗) 34년(1539)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수학하던 곳이다. 현판은 퇴계 선생이 썼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단층 기와집으로 중앙에는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간방(通間房)을 배치한 홑처마집으로 아담한 편이다. 1590년에 개수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건물은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기둥은 방주이며 흘림을 두고 그에 따라 벽선이 그렝이가 되었다. 어간 대청 전면의 문얼굴에는 당판문이 달렸는데, 중반과 하반에 널빤지를 끼우고 윗부분엔 넉살무늬를 구성하였다. 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고형에 속한다. 대청의 좌측 방 북벽에 감실(龕室)이 고미다락처럼 구성되어 신위(神位)를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선비의 가묘 형태이다. 서당 옆에는 450여 년 된 은행나무가 그 옛일을 전해주듯 우람한 자태로 서있다. 서당 뜰에 서서 앞을 내다보면 지금은 안동댐 물에 잠긴 다래 마을과 부포 마을로 건너가는 선착장이 보인다. 선착장의 북쪽으로 건너다보이는 곳이 넓은 들판과 풍광이 아름다웠다는 옛 부포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지난 시절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지금 이곳은 안동의 선비문화순례길 중 1코스인 ‘선성현 길’의 끝이요, 2코스 ‘도산서원 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조목은 1606년 10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하고 겸양하며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李光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月川集)』과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묘소는 월천리 옛 고향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서당 뒤편 부용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조목은 퇴계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 상덕사에 그 숱한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함께 배향되어 있다. 생을 마친 다음에도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는 조목의 삶에 대한 평가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 논쟁과 성학십도 조선시대 최고의 학문적 논쟁인 사단칠정논쟁에서 퇴계 선생은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사단 칠정은 인간의 본성인 측은, 수오, 사양, 시비지심의 네 가지 마음인 사단과 기뻐함(喜), 노여움(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함(愛), 싫어함(惡), 욕망함(慾)이라는 일곱 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이 논쟁은 실마리는 정지운이 자신이 지은 『천명도설』을 퇴계 선생에게 보여 준 데서 발단이 되었다. 『천명도설』에는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퇴계 선생은 이 구절을 “사단은 이(理)가 발하는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하는 것이다”라고 고쳐 주었다. 당시 정지운이나 퇴계 선생 누구도 자신들의 이런 주고받음의 내용이 장차 조선 성리학계를 커다란 논쟁으로 몰고 가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논쟁의 본격적인 시작은 퇴계 선생에 의해 수정된 『천명도설』을 기대승이 보고 나서,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이다. 기대승은 퇴계 선생이 고친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는, 문구를 논박하기 위해 편지를 띄웠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이황과 다른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분명 사람에게는 윤리적인 마음도 나올 수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은 현실적인 마음도 실현돼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이(理)와 기(氣)는 동시에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대승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단을 “본성이 발할 때 기(氣)가 잘못 작용하지 않으면 본연의 선이 곧 이루어지는” 경우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의 경우도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계기가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대승의 편지를 받고 나서 퇴계 선생은 그의 비판을 일정 부분 수용한 가운데 자신의 사단칠정론을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사단은 이(理)가 드러날 때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날 때 이(理)가 타는 것입니다.” 이와 기를 사단과 칠정의 경우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하면서도, 사단은 이(理)가 중심이 되어 실현되고 칠정은 기(氣)가 중심이 되어 드러난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타협책은 그리 오래지 않아 이황의 사단칠정론을 옹호하는 성혼과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이이가 논쟁하면서 이이는 자신의 정신적 멘토이기도 했던 퇴계 선생의 주장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반론은 계속되어 오늘날 이기일원론, 이기이원론으로 일컬어지는 논쟁은 어느 한쪽도 굽힘없이 이어져 퇴계 선생의 계열과 기대승의 반론을 그대로 수용한 이율곡의 계열은 학문적 입장에서 커다란 차이를 갖고 조선의 성리학은 성장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가운데서도 퇴계 선생이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성학십도’이다. 1568년 명종이 승하하자 선조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퇴계 선생이 대제학으로 있을 때였다. 퇴계 선생은 임금에게 당장 힘써야 할 일을 상소문 형태로 올린 것으로 성리학을 10폭의 그림 형태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인과 효를 온전히 할 것’, ‘양궁을 친하게 할 것’, ‘성학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도술을 밝혀 인심을 바로잡을 것’, ‘신하들을 미루어서 생각하고 귀와 눈을 다 바르게 활용할 것’, ‘수심과 반성을 열심히 하여 하늘의 사랑을 이어받을 것’ 등 6조로 요약하여 올리고, 나머지 유학의 핵심적 부분을 그림과 설명을 곁들여 해석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다. 이 책을 통해 주자학 전체의 체계를 모두 열거하며 이를 성학으로 보아 군주 스스로 여기에 응하도록 유도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으며 수기치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비록 여러 선현 유학자들의 글 속에서 채택한 것이지만, 그것을 취사선택하는 하나의 철학적 구성을 이루어놓은 점에서 『성학십도』는 퇴계 선생의 성리학적 학문을 집대성한 것으로 정치를 공부로 이해하는 유학의 사회 철학적 의식이 깃들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시인으로서 퇴계 선생 퇴계 선생은 뛰어난 시인이었다. 퇴계 선생이 읊은 시는 문집에 전하는 시는 2,000수가 넘으며 제목을 아는 것을 포함하면 3,000 여수에 이른다. 도산의 주변 자연과 청량산에 이르는 절경을 완상하며 노래한 시들이 많이 있다. 누구보다도 매화를 좋아한 퇴계 선생은 104수의 매화시로서 「매화시첩(梅花詩帖)」을 엮은 바 있어 「퇴계문집」에 실린 10여 수의 매화시를 합치면 모두 110여 수의 매화시를 지으신 샘이다. 일찍이 매란국죽은 사군자로 각기 지닌 고매한 품성으로 선비들이 좋아했지만 퇴계 선생만큼 매화를 사랑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선생은 도산서당 뜨락에 핀 매화를 보며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라는 제목으로 여섯 수를 읊었다.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 步躡中庭月趁人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네.梅邊行遶幾回巡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夜深坐久渾忘起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香滿衣巾影滿身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선생의 매화와의 인연은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사후까지 이어진 듯하다. 학봉 김성일이 쓴 선생의 연보에 의하면, 선생은 1570년 12월, 70세로 운명하시던 날 아침에도 주위 사람에게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일렀다고 적고 있다. 이토록 매화를 생각하는 지극한 정성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에 쓴 憶“陶山梅(억도산매) : 己巳年(69세) 도산서당의 매화를 생각하다”.에서도 매화에 대한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지금의 도산서원 경내에는 여러 그루의 매화가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선생은 이렇듯 한시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서 불후의 명작인 연시조 ‘도산십이곡’을 남겨 도학자로서의 면모와 자연을 사랑하는 고아한 정취를 격조 높게 나타내었다.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와 짝을 이루는 이 작품은 모두 12곡으로 전 6곡은 자연사물에 접하여 일어나는 심정과 감흥을 읊은 언지(言志), 후 6곡은 학문과 수양애 임하는 자세를 나타낸 언학(言學)으로 나눠진다. 이 가운데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어떠하리?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肓)을 고쳐 무엇하리 <언지 1>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가?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언학5> 퇴계 선생께서 이 작품의 끝에 붙인 발문(跋文)에는 “가곡이 무릇 음란한 노래가 많아서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 되며 이별(李鼈)이 육가(六歌)를 본떠 이 노래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고, 또한 이를 아이들로 하여금 익혀 부르게 하여 나쁜 마음을 씻어 버리고 서로 마음이 통하게 하고자 한다”고 밝혀 자신이 이 노래를 짓게 된 연유와 문학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퇴계 선생의 시는 도학자로서의 사색과 성찰을 바탕으로 급박하지 않고 항상 온화하며, 또한 시심이 두터워 너그러웠던 것이다. 때문에 선생의 시는 자신만의 오롯한 성정을 바탕으로 청량산을 비롯한 선생이 늘 가까이 접했던 주변의 자연 환경이며 숱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이뤄낸 시가 작품들이기에 더욱더 소중한 것이었다. 고결함을 잃지 않은 마지막 길의 퇴계 선생 퇴계 선생은 벼슬길보다는 학문 연구에 일생을 바치신 분으로 기억된다. 벼슬길에 올랐어도 70여 차례나 사직을 청하였을 만큼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려는 그의 진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관직에 있으면서 요양을 위해 고향에 내려와 있던 1570년. 나이 70세에 이르러 임금께 다시 사직을 청하였으나 도리어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간곡한 교지를 받을 뿐이었다. 점차 병으로 쇠약하고 기력이 다해 감을 느낀 퇴계 선생은 주변을 정갈히 하게하고 “빌려온 책을 돌려줄 목록을 만들라”든지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 “유언을 받아 쓸 지필묵을 준비하라” 등 마지막 가는 길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국장을 사양할 것”,“비석을 세우지 말고 그저 작은 돌에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 새기고 후면에는 향리와 조상의 내력과 지행과 출처만을 새기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기고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묘소는 현재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건지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선생의 유훈대로 조성된 묘소는 우리 역사에 남긴 선생의 업적에 비하면 소박하기 짝이 없는 경관이다. 도산서원이 세워지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고 3년 상이 끝나자 제자들은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학덕을 기릴 서원을 짓게 되었다. 그래서 제자들과 유림들이 힘을 합해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뒤편에 계단을 쌓고 서원의 강학소인 전교당과 기숙사인 동재, 서재와 사당을 세웠다. 선생의 사후 4년 뒤인 1574년에 착공 1년 만에 도산서원은 완공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선조 임금이 한석봉 친필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이 되었다. 1576년 서원이 공식적으로 완공되고 퇴계 선생의 위패가 서원 사당인 상덕사에 봉안되었으며, 퇴계 선생에게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5년에는 월천 조목이 종향되었다. 1819년 도산서원 정문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동광명실이, 1930년 서쪽에 자리 잡은 서광명실이 완공되었다. 정부는 1969년에 선생의 학덕을 길이 추모하고 국민 교육의 장으로 보존하고자 사적 제170호로 지정하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선비문화수련원을 개설하여 학교는 물론 공공기관, 기업체를 대상으로 정신문화에 대한 전국적인 연수기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2019년 7월에는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나고 있다. 더욱이 올해 추계향사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하여 여성이 초헌관으로 참배하기도 하였다. 퇴계 선생은 실천윤리를 최우선시하는 교육이념으로 당대 문하에 300여명의 제자와 인재를 국가의 동량으로 길러낸 실로 위대한 스승이다. 오늘도 퇴계 선생을 추앙하는 이들의 숱한 발길이 도산의 기슭으로 이어지고 있다. 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다. 그러나 숱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견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현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새삼 나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본다.
안동 땅 어느 곳에서나 퇴계 선생을 만날 수 있다. 청량산에서부터 안동 시가지 앞을 흘러가는 낙동강 주변의 이곳저곳에는 선생의 학문적 위업만큼 삶의 자취를 찾을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노송정에서 태어난 퇴계 태백산의 지맥인 용두산이 그 기세를 북에서 남으로 뻗어가는 형상인 도산면 온혜리, 와 토계리는 퇴계 선생이 태어나고 생전에 거처하시고 생을 마감하시고 묻힌 마을이기도하다. 예로부터 온천이 있었던 마을인 온혜의 노송정 종택에서 퇴계 선생이 태어났다 .조부 이계양이 봉화훈도로 있을 때, 굶주림으로 실신한 승려를 구해주었는데, 그 승려가 집터를 잡아주면서 " 이 곳에 집을 지으면 귀한 자손을 얻는다." 고 해서 이 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 퇴계가 태어남으로써 퇴계 태실(胎室)로 불리는데 노송정은 진성 이씨 온혜파의 종가이기도 하다. 종택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 안채와 사랑채인 노송정 및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솟을 대문에는 " 성인이 든 문" 이란 뜻의 편액인 성임문(聖臨門)이 걸려 있다. 퇴계 선생의 모친이 ‘꿈에 공자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는 태몽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니 일찍부터 큰 인물의 탄생을 예감한 듯하다. 다른 고택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구조다. 일곱 줄기 기운이 하나로 모이는 명당이라는 태실은 가끔 젊은 부부나 가족들 가운데는 성현의 좋은 기운을 받고자 숙박 체험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고 언제든 편하게 볼 수 있게 개방한다. 곱게 바른 한지창을 통해 은은하게 비치는 볕을 보노라면 이 작은 공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심오한 분위기에 저절로 젖어든다. 지금은 종손 내외분이 집을 지키고 있는 노송정의 안채 대청마루 선반 위에는 십여 개의 소반이 나란히 정돈되어 있어 드나드는 손님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따스한 가을볕 아래 노송정 태실을 나서 발길은 다시 토계로 향한다. 태실 앞을 흐르는 온혜 개울은 토계리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도산은 지명 그대로 퇴계 선생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 그 위업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퇴계가 살았던 퇴계종택은 토계리(兎溪里) 상계에 묘소는 하계에 있다. 모두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학문과 벼슬의 길 퇴계 선생은 태어난 지 일곱 달 만에 부친을 여의게 된다. 선생이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인근 분천의 농암 이현보, 봉화 닭실의 충재 권벌 등 선배 문인들의 영향이 많았을 것으로 본다. 또한 12세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퇴계는 청년 시절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에 유학을 다녔다. 이때 송나라 진덕수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심성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펴낸 ‘심경(心經)’을 접하는 게 되었는데 퇴계의 학문적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퇴계는 두 번의 결혼을 하게 된다. 21세에 의령 허씨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으며 7년 뒤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30세에 다시 안동 권씨 부인을 맞이하였으나 가일의 사락정 권질의 딸인 부인은 친정 집안의 변고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로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이마저 선생의 나이 43세에 부인을 여의었으니 크나큰 학덕을 갖춘 선생의 처복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이런 가정사 속에서도 34세 되던 해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퇴계의 모친은 아들의 품성을 고려한 판단으로 벼슬길의 풍파를 염려하여 고관대작보다는 지방 관리가 되기를 주문하였다. 퇴계는 20세 전후에 기묘사화를 겪었고 45세 되던 해 을사사화의 광풍이 휘몰아치자 이를 피해서 부인도 없이 쓸쓸히 온혜로 귀향하여 칩거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정쟁은 다를 바가 없지 않았나 보다. 이로 인하여 어수선한 마음을 가다듬고자 온혜에서 남쪽으로 십 여리 아래쪽에 있는 토계로 옮겨서 거처를 새로 정하여 칩거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정에서 칩거 중인 선생에게 안동부사를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홍문관응교 직을 다시 내리니 상경하게 되었다. 이때 역시 조정은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으니 48세 되던 해 지방 관리를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가 형인 이해가 같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자 8개월 만에 다시 풍기군수로 이임하게 되었다. 이때 단양을 떠나며 그의 봇짐 속에는 들었었다는 단양의 괴석 두 점과 매화 화분 하나. 관기 두향과의 애틋한 정담은 퇴계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되돌아보게 한다. 서원 교육에 대한 관심 단양에서 풍기군수로 옮겨온 퇴계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만나게 된다. 백운동 서원은 주세붕이 일찍 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이란 본디 지역의 사림들이 주도하여 건립한 교육기관으로 선현의 제향 기능과 지역 인재를 가르치는 강학 기능을 가졌다. 지역의 향교보다는 수준이 더 높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서원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정치와 문화의 지형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는 근원이 되기도 하였다. 퇴계 선생은 청년 시절 관직에 오르기 전 성균관에 유학을 한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과 목민관의 입장으로서 서원의 교육방법과 운영 형태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생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배순이라는 대장장이를 가르쳤는데 향학열이 뛰어났으며, 선생이 풍기를 떠나자 그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책을 읽었고,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배순이 살았던 동네를 배점이라 하고 현재까지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배순을 효성과 향학열이 극진한 동신으로 모시고 동제까지 지낸다고 하니 선생이 끼친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 벼슬길을 떠나 칩거하다 선생의 호가 ‘퇴계’인데 이는 ‘작은 개천가에 물러나 앉는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호가 말해주듯 어쩌면 선생께서는 어지러운 벼슬길보다는 조용한 가운데 심신을 수양하고 인재를 기르고 학문을 연구하는데 더 마음을 두셨을 것이다. 벼슬길에 들어선 지 15년이 지난 49세 되던 해. 선생은 백운동 서원을 사액서원으로 해주기를 청한다. 그러고 난 뒤 1년 2개월의 풍기군수 직을 그만두고 두 궤짝의 책 짐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선다. 고향에 돌아와 지금의 퇴계 종택이 있는 상계의 개울 건너 산기슭에 한서암을 짓고 수양과 학문에 정진하며 칩거하는 중 제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찾아와서 배움을 청하였다. 그러다 보니 한서암이 협소하고 금방 퇴락하여 다시 지어진 것이 계상서당이다. 수 년 전에 새로 다듬어진 계상서당은 도산서당 이전 선생의 수련과 도학전수의 수도처로 선생의 도학이 시작되고 꽃피워진 곳이다. 일찍이 농암선생께서 자주 방문하셨고 율곡선생도 23세시에 이곳에서 사흘 동안 머무르면서 학문을 논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셨다. 계상서당은 비록 작은 집이지만 만물일체라는 선생의 사상은 우주를 아우르는 크고 넓은 것이다. 서당 앞을 흐르는 실개천은 선생이 은퇴하여 퇴계수(退溪水)가 되었고 주변에 거처하시던 집과 자연은 선생의 깊은 학문과 사상이 깃든 도학의 연원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선생의 자취가 모두 없어져 안타깝게 여겼는데 1715년 창운재(蒼雲齋) 권두경 선생이 앞장서서 지금의 퇴계 종택인 추월한수정을 짓고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유적 고증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계상서당, 한서암, 계재 등 옛 유적을 중건하여 계상학림이라 하고 이 마을 전체를 계상도학연원방(溪上道學淵源坊)이라 부르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생의 도학을 체득케 하여 참다운 삶의 길로 이끌어 주고 있다. 지금 이 건물들은 다시 고쳐지어져 개울가에는 2011년 계상학림중건비가 세워져서 이곳을 찾는 이에게 그 내력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다. 도산서당을 짓다 낙동강을 앞에 두고 도산의 기슭에 또 다른 강학의 터인 ‘도산서당’을 마련한 것은 계상서당이 좁고 낡아서 더는 미룰 수 없어서였다. “물과 돌이 있지만 멀리 바라 볼 수 있는 빼어난 경관을” 선생께서는 찾으셨던 것이다. 계상서당에서 멀리 앞에 보이는 나즈막한 산을 넘거나 토계천을 따라 걸어서 하계 마을 지나 낙동강변에 이르러 우측으로 강을 따라 걸어 내려가다가 분천에 가기 전에 이곳의 경관을 보고 정한 것 같다. 이곳에서는 물이 있고 돌이 있고 넓은 들판이 보이고 멀리까지 훤히 트인 경관을 볼 수 있어 심신수양과 도학을 강학하는 곳으로 더없는 곳으로 선택되었다. 도산서당은 지금의 도산서원 건물의 앞쪽 열정 우물 옆에 있는 건물이다. 일찍이 퇴계 선생이 기거하며 공부를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집이다. 처음에는 법연 스님이 집짓기를 시작하여 정일 스님이 다섯 해 만에 지었으니 3칸 건물로 1칸은 자연을 즐겨 완상한다는 ‘완락재’요 동쪽의 1칸은 ‘암서헌’으로 바위틈에 숨어 지낸다는 뜻이 서려 있다. 그리고 암서헌의 처마 밑 동쪽에 덧달아 놓은 마루처럼 생긴 살평살 방이 서당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제자인 이덕홍의 조부 집에서 보고 와서 꾸민 것인데 모름지기 선비로서 욕심내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 덧붙여 서당의 제자들이 기숙하며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농운정사를 마련하였는데 공부의 공(工)자를 본 떠 지었다고 하며, 농운정사 아래쪽에는 제자인 정사성이 서당에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서 기부했다는 역락서재가 있는데 이 건물도 공부하러온 제자들이 묵는 곳이었다고 한다. 1560년 서당이 완성되고 이로부터 퇴계 선생은 7년간 이곳에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비록 500년 전의 일이지만 그날의 유생들이 글 읽는 소리가 지금도 서당의 뜨락에 들리는 듯하다.
농암의 삶과 문학의 자취를 더듬어 그가 태어난 고향 마을이 있었던 분천을 찾았다. 장마 뒤 분천은 어디가 어딘지 쉽게 구분할 수 가 없다. 이미 옛길도 물에 잠기거나 숲이 우거지고 허물어져 시조 작품 속에 나오는 바위며 정자가 있던 자리도 쉽게 찾을 수 없다. 안동 지방의 옛 글귀 속에 나오는 도산구곡 가운데 제4곡에 해당하는 명소였지만 지금은 안동댐으로 인하여 물에 잠겨 대충 그 언저리를 짐작할 뿐이다. 강을 건너 청보리 축제가 개최되는 도산서원의 건너편 의촌리 들판 쪽에서 보면 영지산 자락의 분천의 옛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한 인물의 생애를 살펴보면 주변 환경이 성품이나 문학적 성과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농암의 일생을 볼 때 목민관으로서 선정과 어버이에 대한 남다른 효행이며 시가 작품의 창작은 그 성정의 바탕이 이러한 환경에서 비롯한 것이라 짐작해 본다. 새내기 사관의 당찬 언행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는 조선 초기인 1467년, 당시 안동대도호부의 속현인 예안현 분천리(현재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인제 현감을 지낸 아버지 이흠(李欽)과 안동 권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 본관은 영천이다. 20세 때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 홍귀달의 문하생으로 수학하고, 32세 되던 1498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여러 직을 거쳐 35세 되던 해 사관으로 일컫는 예문관 검열에 추천되었다. 새내기 사관 시절, 사관은 임금의 용상 가까이에서 사초를 자세히 기록할 수 있어야한다고 청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2년 뒤, 사간원정언으로 언관이 되어 세자가 공부하는 서연관의 실수를 아뢰었는데 이때 보고의 잘못을 빌미로 안동의 안기역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처형을 기다렸다. 김일손이 사초에 올려놓은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발발한 무오사화 4년 뒤의 일이었고, 갑자사화가 일어난 해이다. 연산군은 자신의 심사를 자주 거스른 농암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얼굴이 검붉고 수염이 긴 자’로 부르며 별렀다고 한다. 그런데 연산군이 석방할 죄수 명단에 점을 잘못 찍는 실수로 농암은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하고 안기역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관 친구들은 강직하고 공명정대하게 공무 수행을 하는 그를 보고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다. 이는 외모는 검으나 심성이 냉엄하다는 뜻이었다고 하니 농암의 성품을 짐작할만하다. 30여 년 외직의 청백리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고 조정으로 다시 돌아온 농암은 이듬해 사헌부지평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조정의 내직을 거치다가 42세 되던 해 자청하여 영천군수로 나왔다. 특별 승진 코스요 출세의 지름길인 청요직에 올랐지만 농암은 지방의 외직을 선택했다. 이후 밀양, 충주, 안동, 성주, 대구, 영주, 경주, 경상도관찰사로 이어지는 아홉 고을에 30여 년간 군수, 부사, 목사, 부윤을 역임하면서 우수한 목민관으로 선임되어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했다. 우부승지를 비롯한 몇 번의 중앙보직을 받았지만 얼마 못가서 지방으로 다시 나와 버렸다. 30여 년 이 고을 저 고을의 목민관으로서 지내면서 선정과 준법의 표상인 청백리로 녹선 되었다는 것은 농암의 성품과 천성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모두가 중앙 요직인 내직을 선호하는 풍토 속에서도 지방의 목민관을 자청한 것은 바로 남다른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암은 목민관으로 여러 고을에 재임 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자제나 친구, 친지들이 함부로 자신을 만나러 관아에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에게 엄격하고 백성들에게는 관대했다. 가는 곳마다 향교를 재정비하여 예절 교육과 도덕적 기풍 진작을 위해 열성을 다했다. 이러한 선정의 결과로 다른 고을로 전출시에는 고을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거나, 떠나는 날 쫓아와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길을 메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퇴계 선생이 적은 행장에도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인도 문벌 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고 밝혔듯이 휴머니즘 넘치는 공복의 길을 걸었다. 이렇듯 오랜 외직 생활을 하였음에도 청백리의 표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치적과 청렴과 결백이라는 자기 관리의 바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70에 색동옷 입고 춤을 추다 농암 이현보의 효심은 지극했다. 효절공이라는 시호가 말해주듯 처음으로 영천 군수로 부임한 것도 어버이를 자주 뵙고자하는 효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효성을 바탕으로 1512년 46세 되던 해 고향의 영지산 자락 분강의 기슭 농암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애일당(愛日堂)'이다. 정자의 편액을 ‘애일’이라 함은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일신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부모 효도에 날(日)이 부족함의 뜻이 거기 있다고 했다. 1519년 53세 때, 안동대도호부사로 재임 시 귀천을 가리지 않고 부내의 80세 이상 노인들과 양친을 모신 경로잔치를 열었다. 이른바 ‘화산양로연’인데 이 때의 광경이 ‘기묘계추화산양로연도’ 그림에 고스란히 남아 전한다. 이 뿐만 아니라 1533년 홍문학 부제학 시절 고향에 내려와 선친이 94세일 때 향중의 80세 이상 노인을 애일당에 초청해 잔치를 여니 무릇 아홉 사람이었다. 이른바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개최했는데 이후 구로회는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이 잔치에서 농암은 70세 늙은 몸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마치 중국 고사의 노래자처럼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림을 실천했다. 농암의 이러한 효행과 애일당 건립을 축하하는 동료, 친구 등 당대 명현들의 다양한 친필 시편 40여 편이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에 전해질 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이 하사한 어필 ‘적선(積善)’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542년, 76세에 이르러 농암은 정계를 은퇴했다. 더 이상 벼슬을 바라지 않고 참판의 신분으로 조용히 물러나니 임금은 금서대(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하고, 실록은 명리에 뜻이 없어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난다는 뜻의 ‘염퇴(恬退)’라고 기록했다. 강호가도의 창시 농암은 우리 국문학사에 시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효빈가’, ‘농암가’, ‘어부가’, ‘생일가’를 비롯한 한시 작품까지 시가문학에서의 문화사적 업적이 아주 크다. 농암이 은퇴 후 한양을 떠나는 배 안에서 시조 한 수를 읊었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은 ‘효빈가(效顰歌)’이다. 귀거래(歸去來) 귀거래(歸去來) 말 뿐이요 가는 이 없네 전원(田園)이 장무(將蕪)하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草堂)에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나명 들명 기다리나니 벼슬길에서 염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작자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농암은 고향에 돌아온 후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생활의 단편을 작품으로 남겼는데 ‘농암집’에 전해 온다. 귀먹바위인 ‘농암’에 올라 그 감회를 시조로 읊었으니 ‘농암가’이다. 이 작품을 새긴 ‘농암가비’가 현재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져 있다 농암(聾巖)에 올라보니 노안(老眼)이 유명(猶明)이로다 인사(人事)가 변(變한)들 산천(山川)이야 변할까 안전(眼前)의 모수모구(某水某丘)는 어제 본 듯 하여라 이렇듯 귀거래 후 분강의 강가에서 물아일체의 경지에 몰입하여 강호 풍류의 진락을 얻게 된다. 교류하던 문인 동료, 후배들과 더불어 애일당, 분강의 바위 등 구체적인 자연 공간을 무대로 한 시회를 통해 자연에 대한 감흥과 풍류가 작품으로 승화되어 분강가단(汾江歌壇)을 형성하여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이루는데 기여하게 되었다고 본다. 농암은 예로부터 전해오던 ‘어부사’ 12장 가운데 3장을 버리고 9장으로 장가를 만들어 읊을(詠)수 있게 하고, 또 한편 ‘어부사’ 10장을 단가 5장으로 다듬어 창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퇴계 선생은 ‘어부가’ 발문에서 “-벼슬을 버리고 분수가로 염퇴했다....강호지락의 진(眞)을 터득한 것이다. .....이를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다. 아! 선생은 이미 그 진락(眞樂)을 얻었다”라고 찬양했다. 어부단가(漁父短歌) 5장 가운데 2장을 보면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나 있다. 굽어보면 천심녹수(千尋綠水) 돌아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열 길 티끌세상에 얼마나 가렸는가. 강호(江湖)에 월백(月白)하거든 더욱 무심(無心)하여라. 어지러운 세상사를 멀리하고 자연에 묻혀 그 즐거움을 누리는 작자의 강호 생활의 정신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농암의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 이형상(李衡祥)의 ‘창보사’ 등에 전승되고 어부가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농암은 이 뿐만 아니라, 오늘날 문학동호인회 격인 ‘월란척촉회(月瀾躑躅會)’를 통해 퇴계를 비롯한 자신의 자제들과 퇴계의 제자들이 함께하여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여 강호문학의 크나큰 성과를 이루어내기에 이른다. 이러한 활동은 이른바 영남가단(嶺南歌壇)이 형성되는 기틀이 되어 송순-정철-윤선도로 이어지는 ‘호남가단(湖南歌壇)’과 더불어 국문학사의 전통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농암은 만년에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인 기로소(耆老所)에 입소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은퇴 이후에도 지중추부사에 제수되는 등 나라에서 품계를 내려 예우할 만큼 주변으로부터 효와 충절의 표상이었다. 1555년 89세에 세상을 떠나니 퇴계 선생이 그의 행장을 쓰고 효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농암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유적은 원래 자리했던 분천리를 떠나 2001년부터 조성한 현재의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 부근으로 모두 옮겨 이건, 복원해 왔다. 선생의 학문과 덕향을 제향하는 분강서원이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가득한 애일당, 조상의 유업을 이어간다는 뜻이 담기고, 조선 중종 때 시·서·화 삼절로 뛰어난 신잠의 글씨가 걸린 긍구당, 원래 분천의 강가에 있던 농암 각자 바위, 학문을 논하던 강각, 신도비, 선조가 하사한 ‘적선(積善)’ 현판이 걸린 종택 등 강호문학의 고향 분강촌의 유적 조성 사업이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이뤄지고 있다.
포항지진과 코로나19 여파 등으로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던 포항지역 아파트가격이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다. 가격 폭등 요인은 근본적인 공급 부족과 타지 투기세력이 작용한 것으로 드러나 실수요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이에 본지는 포항시 부동산 가격폭동에 따른 원인과 대책을 심층보도한다.
한 손에 막대 들고...’로 시작하는 탄로가와 대역학자로 널리 알려진 우탁의 역사 속 자취를 따라가 본다. 안동에는 고려 말에 예안으로 와 은거하던 역동 우탁 선생과 관련된 유적들이 낙동강 주변에 몇 군데 남아있다. 먼저 안동시내에서 봉화로 이어지는 35번 지방도. 일명 퇴계로를 따라가다가 오천군자마을을 지나서 한국국학진흥원이 있는 서부리에 못 미쳐 도로의 왼편 산기슭에 우탁 선생의 옛 집터를 알리는 유허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가 있다. 원래 이 비석은 집터의 북쪽 십리허 강가인 예안면 부포리(현재 와룡면 선양동(지삼의)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안동댐 건설로 1976년에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1227-2로 이건하고 1998년 다시 물에 잠긴 예안 면 소재지의 옛 터가 건너다보이는 도로변의 현재 위치로 옮겼다. 비석의 앞면에는 ‘고려제주역동우탁선생유허(高麗祭酒易東禹倬先生遺墟)’라고 되어 있고 비문에는 ‘지삼리(知三里)’라는 마을 이름이 우탁 자신의 학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퇴계 선생이 우탁을 기리기 위해 예안에 역동서원을 세웠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도끼를 들고 극간하다 우탁은 원종 3년(1262) 지금의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신원동(품달촌)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탄생해서 3일간을 계속 울어대기만 했다. 집안과 마을 사람들은 아기가 잘못되었다고 수군거렸는데, 지나던 노승이 그를 보고 “그 녀석 벌써부터 주역을 외우고 있구만. 큰 인물이요.”하면서 지나갔다고 한다. 그런 이후 아기가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우탁의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이며 세상에서 그를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었는데 시조인 우현(禹玄)의 7대손으로서 고려의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우천규(禹天珪)의 아들이다. 우탁은 1278년(충렬왕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르는 신사(神祠)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 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다. 이에 우탁은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 그런데 이 자리에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며 상소(上疏)를 읽어 올리는 신하가 상소를 펴 들고는 감히 읽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걸 보자 우탁이 낯빛을 엄(嚴)히 보이며, '경이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로서 왕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이에 이르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 하고 소리를 질러 꾸짖으니 좌우에 있던 대신들이 크게 놀라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였다." 위와 같은 지부상소(持斧上疏)의 기개는 고려는 물론 조선 왕조를 거치면서 사대부나 유생들에까지 이어져 국정과 기강, 풍속을 바로 잡고자하는 충성심에서 올린 상소는수 만 건에 달하며 오늘날 청와대의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상소문 형태의 글이 올라와 회자되고 있다. 우탁은 상소 이후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지내다가 나이가 많아 스스로 벼슬을 물러났다고 한다. 주역을 동쪽으로 옮기다 우탁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만년을 안동 예안현 서남쪽 5리쯤 되는 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역동은 은거하면서 인근의 마을을 중심으로 도학, 예의, 절조 세 가지를 중시하여 가르쳤는데 뒷날 세상 사람들이 이 마을을 ‘지삼의(知三宜)’ 또는 ‘지삼리(知三里)’라 불렀다고 한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이 우리나라에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정이(程頤)가 『주역』을 주석한 『정전(程傳)』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 만에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우탁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주역(周易)이라는 책을 처음 접하고 읽어보니 탐나는 책이라 구하여 본국에 가지고 오려 했으나 내어주지 않으므로 탐독하여 머리에 외워서 귀국했다고 한다. 그 까다롭고 방대한 분량을 외우다니 실로 수긍이 가지 않을 일이다. 그가 "주역을 동쪽으로 옮겼다"는 뜻으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오늘까지 그를 가리켜 '우역동(禹易東)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는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시조 2수와 몇 편의 한시가 전하고 있다. 역동서원이 세워지다 조선조에 와서 퇴계 이황의 발의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우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67년(선조즉위) 예안 부포리 오담에(현재 계상고택 자리) 안동 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역동서원기를 통해 당시의 위치와 경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역동서원은 선생이 사시던 댁에서 동북쪽으로 십여 리 쯤 떨어진 곳에 있다. 1558년 금난수(부포거주)가 이황선생과 서원건립과 장소를 협의하여 낙동강은 태백 황지에서 원류를 시작하여 청량산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 여기서 오담(鰲자라 오 潭못 담)을 이루었으니 산의 동쪽은 병풍과 같이 둘러온 것이 뱀처럼 굽이쳐 서쪽으로 가다가 담(潭)에 임하여 멈추고 이에 언덕이 마련되니 산을 의지하고 담을 굽어보아 심오하면서도 널리 트이어 스스로 좋은 형세를 이루어 먼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것 같기도 하며 나열한 산봉우리는 읍하는 듯 강이나 못은 따로 두른 듯 하여 서원의 기지로 정하기에는 이와 바꿀 곳이 없었다. 북은 영지산, 남은 파둔산, 서는 부용산, 동은 취병산이 있어 사방 운산이 겹겹이 고리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큰 대에 임하였으니 시내는 큰 분천(汾川)의 하류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명칭은 서원이 건립되는 지역의 명칭이나 봉향을 하게 되는 주된 인물이나 명현의 호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역동서원의 경우에는 지명이나 호를 따르지 않고 “역동”이라 붙여지고 있다. 이것은 퇴계 선생께서 우탁이 주역을 해득하여 일찍이 이 땅에서 강학하여 널리 교수한데서 명명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서원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도산서원에 머물던 김광계(金光繼)가 쓴 매원일기(梅園日記)에 잘 나타나 있다 “ 역동서원 친구들과 배를 묶어 뱃놀이를 하다. 1608년 5월 5일, 며칠 전부터 도산서원에 머물고 있던 김광계는 이임보(李任甫)와 여원(汝遠), 그리고 막내아우인 광악(光岳)과 함께 역동서원에 가기로 했다. 며칠 전 역동서원에 갔던 광악이 어제 돌아와서는 그 곳에 있는 친구들이 놀러 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역동서원은 도산서원이나 예안향교와는 거리가 매우 가까운데 강을 건너야만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한동안 역동서원에 가질 못해 한 번 날을 잡아 가려고 했는데, 때마침 광악이 친구들의 말을 전하니 김광계는 바로 길을 나선 것이다. 배를 하나 불러 다 함께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한 군데 여울에 이르러서 갑자기 배가 멈춰서고 말았다. 물이 얕아 배가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김광계와 일행들은 모두 옷을 벗고 배에서 내려 배를 밀기로 했다. 다 같이 힘을 모아 밀고 당기고 하였으나 역시 배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소식을 들은 역동서원의 여러 친구들이 노를 저어서 물결을 거슬러 위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광계와 일행들이 있는 곳에 다다른 역동서원의 친구들은 배에서 내려 다 함께 힘을 합쳐 배를 끌어서 겨우 그 곳을 빠져 나왔다.역동서원에서 나온 친구들은 구경립(具景立), 이의경(李毅卿), 권진보(權進甫)·신재(臣哉)·인재(鄰哉), 이광전(李光前), 임종보(任宗甫), 윤응이(尹應易)였다. 이들은 자기들이 타고 온 배와 김광계 일행이 타고 온 두 배를 묶어 강 가운데로 나가기로 하고 배를 묶었다. 묶인 두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갔더니 역시 더욱 재미있었다. 경치도 일품이어서 다들 흥이 넘치고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뱃놀이는 즐거웠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서 예안으로 돌아올 수 없어 다 함께 역동서원에서 잤다“. (출전-한국국학진흥원, 테마스토리) 이후 1684년(숙종10)에 ‘역동(易東)’이라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당했다가 1969년 안동시 송천동에 복원되었다. 숙종이 사액한 현판은 유실되고 퇴계 선생이 쓴 ‘역동서원’과 ‘광명실’ 등의 현판이 전한다. 그러나 안동대학교가 송천동으로 이전하면서 이 서원이 학교 경내 부지에 포함되어서 1991년 단양 우씨 문중에서 안동대학교에 기증을 하고 서원 관리도 대학 측에서 맡게 되었다. 우탁을 배향하는 또 다른 서원으로는 단양에 단암서원, 최초의 사관지였던 영해에 단산서원과 안동에 구계서원 등이 창설되었다. 구계서원은 현재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상현사(尙賢祠), 8칸의 명교당(明敎堂), 신문(神門), 입도문(入道門), 1칸의 전사청(典祀廳), 1칸의 장서각(藏書閣), 10칸의 주소(厨所) 등이 있다. 사우인 상현사에는 우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명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전사청은 제수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이며, 주소는 서원을 수호하는 고자(庫子)가 사용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과 8월 하정(下丁-음력 매달 하순에 드는 정일(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안동에서 봉화로 이어지는 또 다른 도로인 933번 지방도를 따라서 예안면 행정복지센터에 못 미쳐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 속칭 솥우물 마을에 역동 우탁의 묘소와 학덕을 기리는 재실인 정정재와 신도비가 있다. 정정재 재실 앞에는 시조와 한시를 새긴 시비와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 쓰인 큰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역동서원의 옛터를 알리는 유허비가 안동시에서 조성한 안동선비순례길 6코스 중 역동길로 이름 지어진 부포리 계상고택 부근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보면 옛날 역동 서원이 자리했던 곳의 풍광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북쪽의 청량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도산서원 앞을 지나 역동서원이 자리했던 넓은 부포들을 가로질러 월천서당이 있는 달애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데 이 강에 이웃한 서원의 옛 유생들이 함께 뱃놀이를 즐기던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우탁 선생은 성리학자이면서 문인으로서 시조 3수와 한시 여러 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데 없다 적은 덧 빌어다가 머리 우에 불리고자 귀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우탁(禹倬:1262-1342)- 탄로가 <청구영언> 이 시조는 국문학사에서 전해오는 시조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우탁의 탄로가이다. '탄로가(嘆老歌)'는 문자 그대로 '늙어 감을 한탄하는 노래'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월 속에 늙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리는 다 같은가 보다. '막대기'와 '가시덩굴'로 늙어 감을 막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백발'과 '늙음'을 의인화하여 자연의 섭리를 '막대'와 '가시'로 막으려는 모습이 익살스러우며 감각적이다. 늙음을 한탄하는 작자의 소박한 표현이 인간 능력으로는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여유와 대학자로서의 면모와 달관의 경지를 표현해 주고 있다. 둘째 수도 늙음을 한탄하면서도 삶을 달관하는 여유와 관조의 자세를 드러내고 있는데 눈과 바람, 해묵은 서리 등 자연 현상을 인생에 비유하여 인간 본연의 원초적 소망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탁이 남긴 한시 중에는 영남의 4대 누각 중 하나인 안동의 영호루에 올라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작품이 있는데 칠언율시 형식으로 되어있다. 영호루에서 영남에 여러 해 동안 두루두루 놀았으나 영호의 좋은 경치 가장 사랑하였네. 방초 짙은 나루터에 나그네 길 나눠지고 수양버들 푸른 둑 가에 농가가 있네. 바람 잔 수면에는 푸른 연기 비끼었고 오래 된 담 위에는 버섯이 자랐구나. 비 갠 뒤 들판에는 격양가 부르는 소리 앉아서 저 수풀 끝에 밀려 있는 뗏목 보노라. 嶺南游蕩閱年多 最愛湖山景氣加 芳草渡頭分客路 綠楊堤畔有農家 風恬鏡面橫煙黛 歲久墻頭長土花 雨歇四郊歌擊壤 坐看林杪漲寒槎 이렇듯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학자이자 조정의 충성스런 관료로서 남다른 평가를 받은 역동 선생은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퇴계 선생은 역동서원기문에서 “선생의 충의대절은 천지를 움직이고 산악도 흔들 만하다. 경학의 밝음과 진퇴의 올바름은 후인의 사표가 되니, 백세의 제향을 받을 자 선생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라고 역동 선생을 높이 기리고 있다. 우탁 선생이 가신 지 400여 년이 지났어도 그 숭고한 학덕과 자취는 오늘도 빛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안동댐과 임하댐 하류의 낙동강에는 습지가 널리 분포한다. 이들 습지는 대부분 토사가 퇴적하여 생긴 하천 습지이다. 즉 1976년 안동댐이 생긴 후, 유량流量이 줄어들면서 점토, 마사토 등이 퇴적하여 생긴 습지인 것이다. 습지는 말 그대로 물기가 있는 축축한 땅이다. 습지는 여러 생물의 서식처가 될 뿐만 아니라, 오염 물질 정화 기능까지 있어서 자연의 콩팥으로 불릴 만큼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습지를 이루는 요소는 습지에 흐르거나 고여 있는 물, 습지의 바닥을 이루는 흙, 그리고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습지를 이루는 축축한 흙을 습윤 토양이라 부르고, 식물을 수생식물(물풀)이라고 한다. 수생식물은 오염된 물을 정화하고, 수변 지역의 침식을 억제하며, 어류와 조류에게 안전한 서식처와 먹이를 제공한다. 습지는 내륙 습지와 연안 습지로 나뉜다. 화산이나 습곡, 단층 등의 지형적인 원인으로 생성되는 호수, 늪, 하구 등이 대표적인 내륙 습지이다. 이에 반하여 삼각주 지역이나, 해안, 갯벌 등은 대표적인 연안 습지이다. 이 습지는 강에 의해 실려 온 토양 침전물이 유속이 느려짐에 따라 침전하여 생성된다. 안동 권역의 낙동강에 형성된 안동 습지는 물이 흐르는 하천과 범람원 상에 분포하는 하천 습지로, 내륙 습지이면서도 특이하다. 안동 습지는 3단계를 거쳐 생성되었다. 우선 강물에 토사가 섞여 흐르고, 유속이 느려지는 부분에 토사가 쌓인다. 이렇게 토사가 쌓인 곳에 풀이 자라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도 자란다. 마지막으로 강물의 범람이나 비로 인하여 물웅덩이가 생겨 마침내 습지를 완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안동 습지들은 대표적인 검안 습지와 구담 습지를 비롯하여 마애 습지, 풍산 습지, 병산 습지 등 낙동강을 따라 길게 분포한다. 검암 습지는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와 고하리, 풍산읍 계평리 일대의 넓은 모래톱을 배경으로 생성된 습지이다. 북쪽에서 흘러온 낙동강과 동쪽에서 흘러온 미천이 검암 마을 앞에서 마주친다. 두 강이 만나는 남쪽으로 토사가 쌓여 넓은 습지를 만들었다. 이 습지를 뚫고 낙동강은 상락대 절벽에 부딪힌다. 그 바람에 강에 휩쓸려 내려온 토사가 상락대 맞은편에 쌓여 모래톱을 이루었다. 이렇게 모래톱이 두껍게 쌓이면서 습지의 식생이 들어서서 또 다른 습지를 이룬 것이다. 이 둘을 묶어 검암 습지라 하는데, 이 습지에는 노랑어리연꽃, 버드나무 등 다양한 식물군이 서식한다. 낙동강 습지의 천이遷移 단계를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4대강 사업으로 이 습지가 한때 훼손의 위기를 맞았지만, 지금은 원상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검암 습지를 배경으로 안동시에서 낙동강 70리 생태공원 조성 사업의 하나로 검암 습지 생태공원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와 검암리 일대 0.46㎢에 들어선 이 생태공원에는 생태학습관, 생태 탐방로, 야생 화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친환경적인 가족 단위 휴양과 자연 학습, 야영 활동 체험이 가능해 인근 하회마을과 연계한 체류형 관광이 가능하다. 검암 습지는 단호리 마을을 좌안으로 껴안으며 단호교 밑을 지나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이르면 검암 습지에서 마애 습지로 그 이름이 바뀐다. 단호리와 마애리를 잇는 단호교 위에서 낙동강 상류 쪽을 바라보든, 하류 쪽을 바라보든 버드나무 등 다양한 식생이 자욱하게 들어선 마애 습지와 접하게 된다. 찢어진 습지 사이로는 길쭉하게 파인 웅덩이가 나 있고, 장마철이라 그 웅덩이에 고인 물은 흙탕물이다. 물이 맑다면 망천 절벽은 물 위에 뜰 것이고, 습지 어류들은 물속에 노닐 것이다. 그리고 소금쟁이들은 물 위에 뜬 망천 절벽의 그림자를 평평하게 밟고 유유자적할 것이다. 이곳 역시 4대강 사업의 하나로 직강 공사를 하면서 파헤쳐졌지만, 지금은 옛날과 다름없는 습지로 복원되었다. 마애를 지난 낙동강은 풍산들을 굽이돌면서 풍산들을 가로질러 북쪽에서 흘러들어온 신역천을 그 품에 받아들인다. 신역천을 받아들인 낙동강은 화산에 부딪히면서 다시 굽이친다. 그러는 사이에 그 수변에 습지 하나를 만들어 놓는다. 풍산 습지이다. 풍산 습지를 끼고,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화산 기슭을 따라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4km 들어가면 병산서원이 나선다. 낙동강은 남쪽에 병산을 두고, 병산서원 앞에다는 긴 모래톱을 형성해 놓았다. 옛날에는 흰 모래톱으로 유명했던 것이 지금은 습지화가 이루어지면서 푸른 풀이 이 모래톱을 덮고 있다. 병산서원에서 하회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화산 기슭을 타고 나 있다. 유교문화길이다. 병산서원에서 출발한 이 길은 낙동강과 7백여m쯤 나란히 이어지는데, 강섶은 습지로 변해 있다. 습지에는 떡버들이 군락을 이르는 가운데 뽕나무, 미루나무, 시무나무 등이 그 틈에 끼어 자란다. 이들의 세력이 강하여 습지는 완전히 쑤[藪]를 이루어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길에서는 낙동강의 물을 가늠할 수 없다. 젖은 습지에는 멧돼지들이 뒤지고 간 흔적인 뚜렷하고, 고라니 같은 짐승의 발자국도 어지럽게 나 있다. 나무에는 덩굴 식물이 칭칭 감고 오르고 있다. 죽은 나무들도 서로 어지럽게 엉켰는데, 이름 모를 큰 버섯이 죽은 나무에 달려 있기도 하다. 습지는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습지의 토양은 홍수 때 많은 물을 머금어 웬만한 폭우가 내려도 홍수나지 않게 하고, 지표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인 표면 유출수를 효과적으로 흡수하여 토양의 침식을 방지한다. 습지는 대기 중으로 유입되는 탄소를 차단하여 그 양을 조절하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와 이상 기후를 방지할 뿐만 아니라. 지구의 허파라 할 만큼 자연을 정화한다. 그리고 습지는 다양한 동식물에게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검암에서 병산까지 내려오면서 습지를 살피는 과정에서 습지가 주는 이러한 선물을 확인하였다. 안동 권역 끝으로 다가서면서 낙동강은 큰 습지 하나를 지어 놓았다. 안동을 대표하는 구담 습지이다. 이 습지는 안동시 풍천면 기산리 구담교와 광덕교 사이 4km에 걸쳐 자리 잡고 있다. 구담 습지의 폭은 100~150m 정도이고, 수심은 50~80cm 정도로 그리 깊지 않다. 자연 상태의 습지라면 100여 년이 걸린다는데, 이 습지는 댐 건설로 유속이 떨어져 20년 만에 형성되었다. 안동댐 축조 후 수량이 줄어들면서 점토, 미사微砂 등이 점차 퇴적돼 그 위에 각종 동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변했다. 구담 습지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왕버들 군락인데, 10여 전에는 수령 20년 안팎의 왕버들이 습지에 꽉 들어차 있었다. 왕버들 아래 형성된 습지 웅덩이 부근에는 달뿌리풀, 강아지풀, 물억새, 갈대 등이 무성하다. 습지는 유속이 빠른 여울과 흐름이 느린 웅덩이가 혼재하는 것이 특징인데, 그 사이에 피라미와 기름종개, 납자루, 돌마자 등 희귀종이 많이 서식한다. 수변 식물, 어류와 더불어 습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동물로는 황조롱이, 수달, 수리부엉이 등 천연기념물과 고라니, 너구리, 멧돼지, 뱀, 들쥐 등이다. 구담 습지에는 이런 동물과 더불어 왜가리, 백로, 청둥오리, 원앙, 비오리 등의 철새도 많이 서식한다. 이러한 구담 습지가 그 모습을 바꾼 것은 2011년에 4대강 유역 사업으로 구담 마을 앞에 구담보가 지어지면서부터였다. 구담 앞에서 낙동강을 가로질러 지은 구담보는 길이 423m, 높이 2m의 작은 보이다. 이 보를 짓는 과정에서 보가 들어서는 지점에서 상류 2백m쯤에 이르는 구간의 구담 습지가 뜯겨나갔다. 구담보가 크게 영향을 미치는 구간은 구담 습지의 옛 모습을 잃고 말았다. 나머지 부분도 준설되긴 해도 지금은 옛 모습을 대체로 회복한 상태이다. 구담 습지가 회복되면서 습지 식생도 복원되었다. 왕버들이 습지 안에 가득히 들어서고, 피라미, 돌마자, 납자루 등 작은 어류와 잉어 같은 큰 어류도 서식한다. 황조롱이, 수리부엉이 등 맹금류, 오리류, 왜가리 등 조류, 고라니, 너구리, 멧돼지 등이 찾아들고 있다. 수달은 그 개체가 늘어 물고기들을 남획하고 있다. 광덕교에서 구담 습지를 바라보면 구담보가 지어지기 전과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습지가 회복되었음을 실감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리 밑 수심이 전보다 깊어지고 여울이 약해진 점이다. 구담 습지는 옛날처럼 낙동강을 찢기도 하고, 섬을 이루기도 한다. 환경 운동가들은 구담 습지가 뜯겨 나갈 때, 습지가 주는 혜택과 환경 보전을 내세우며 구담 습지의 훼손을 결사반대했다. 반면에 구담 주민들은 그것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의 은빛 반짝이던 모래펄을 회복하고, 습지로 말미암아 겪는 수해를 막아내자는 것이 주민들의 찬성의 이유였다. 양측 모두 논리성을 갖춘 주장이었다. 어쨌든 세월은 흘러 십 년이 지났다. 십 년이 지난 지금 구담보는 들어섰고, 구담 습지는 회복되었다. 안동 하류 지역에 생성된 많은 습지를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이들 습지를 온전하게 보전하면서 친환경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봉화군이 코로나19와 집중호우로 어려움을 겪는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추석 전인 지난달 16일 농업인 경영안정자금 47억여 원을 10개 읍면 마을회관서 지급해 군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지급대상은 올해 신청농가 가운데 농업 경영체 등록 여부, 주소, 실거주, 농외소득 한도 초과 등의 심사에서 적격자로 판정된 6천700여 농가이며, 농가당 70만원을 지급했다. 농업인 경영안정자금은 농업인의 소득 안정과 농업·농촌 지속 가능한 발전과 공익적 기능 증진을 위해 엄태항 봉화군수의 강력한 의지로 추진한 민선7기 역점 공약사업 중의 하나다. 지난해 도내 지자체서 최초 도입한 경영안정자금은 지역에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이 가능한 봉화사랑상품권으로 지급되면서 농가와 소상공인이 상호 상생하는 기회가 됐다. 올해는 전년대비 20만원이 상향된 농가당 70만원이 지급된 가운데, 봉화읍 적덕2리 마을을 직접 방문해 농업인경영안정자금에 대한 이장 등 마을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농업인 경영안정자금이 지급되는 첫날, 비 내리는 날씨에도 적덕2리 마을회관 앞은 지급 30분 전부터 농업인 경영안정자금을 받으려는 마을 주민들의 대기 행렬이 이어졌다. 마을 주민 가운데 가장 먼저 경영안정자금을 수령한 장성락(78)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경영안정자금을 지급 받아 농가에 큰 보탬이 된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장 씨는 "비록 농가에서 충분한 금액은 아니지만 영세농가 등 농업인들이 농사짓는데 필요한 종자·종묘·농약 등 소모성 농자재를 구매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며 "농업인 경영안정 자금으로 받은 상품권을 사용하는 데에도 큰 불편함이 없다"며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 다만, "지급된 농업인 경영안정자금이 현금이 아니라 상품권이어서 자칫 무분별한 사용이 우려되는 만큼 농가들이 꼭 필요한곳에 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전했다. 김기태(78)씨는 “지난해보다 20만원이 인상된 70만원이 지급돼 농가에 큰 도움이 된다"며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계획"이라면서 농정정책에 감사를 표했다. 일부 농가는 "경영안정자금의 지급시기를 농가의 농작물 상황에 맞게 지급했다면 농약, 농자재 등을 구입해 병충해 예방에 효과적일 것"이라며 조기지급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군은 당초 상반기 35만원, 하반기 35만원으로 각각 나누어 지급할 계획을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지급과 혼선을 빚을 수 있어, 이번 하반기 추석 명절 전 일괄 지급했다. 적덕2리 신기섭(67)이장은 "올해와 같이 코로나19 와 농작물피해등 심각한 상황에 군이 지급한 경영안정자금은 지역 농가들은 무었보다 정말 요긴하다"며 크게 환영했다. 또, 농업인 경영안정자금 현장 지급에 누락이나 애로사항 질문에는 "지원자격이 농지원부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 농업인 경영체등록 후 농사 1년 이상이 경과돼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지난해 신청·지급자료가 올해 유용하게 쓰이면서 현재 우리 마을 57세대 모두에 지급이 완료된 것은 군에서 사전에 철저한 준비와 홍보로 지급에 불편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군이 지난해부터 시작한 지원이 기초자료를 통해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지급돼 불법 지급받던 관행도 사라진데다 향후 정책적인 효과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는 농업인 경영안정자금 지급이 지난해 첫 지급에 이어 올해는 지급대상의 투명성과 정확성을 증명하고, 공정성을 가져오는 정책의 순기능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급 업무를 수행하는 적덕2리 분담 공무원인 강인정 주무관은 지난 8월24일 봉화읍 총무팀으로 첫 발령을 받아 농업인 경영안정지원금 지급 업무를 처음 담당했다고 한다. 그는 "올해는 신속하고 집중적으로 지급을 할 수 있어 보람도 크고 처음 맡은 업무에 자신감도 생겼다”며 “이번 지원금이 작게나마 농민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엄태항군수는 "코로나19 등 어려운 재정 여건속 농민들에게 지급한 농업인 경영안정자금이 영농에 보탬은 물론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데도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동시가 낙동강 700리 생태공원 조성 사업의 하나로 2008년 4월에 시작하여 2010년 5월에 완공한 낙동강자연생태공원은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와 검암리 일대 0.46㎢에 들어섰다. 이 사업은 숲을 정비하고 퇴적토 준설로 하천 범람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습지 보존과 생태환경 조성으로 시민과 관광객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일이었다. 이 사업이 완료됨으로써 낙동강을 공유하고 있는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와 하아리, 풍산읍 마애리가 새로운 관광 명소로 주목받게 되었다. 낙동강자연생태공원 안에는 낙동강생태학습관, 단호샌드파크, 하아그린파크가 들어섰다. 단호리에 소재하는 상락대上洛臺 서쪽 끝 벼랑 위에 들어선 낙동강생태학습관은 자연 체험의 감동과 자연에 대한 이해를 위해 낙동강 700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현실감과 공간감을 연출한 생태 체험 학습관이다. 이 학습관은 전시관, 영상실, 야외 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넓이 325㎡의 전시관은 지구의 콩팥인 습지, 낙동강 습지 이야기, 습지 친구들, 습지와 사람들 등 4개의 존으로 구성되었다. 각종 모형과 LCD 프로젝터, 19″ LCD 와이드 컬러 TV, 스피커, 슬라이딩비전, 그래픽패널, 키오스크, 서책식 패널 등을 이용한 습지의 다양한 모습과 변화, 생태 환경, 습지와 사람과의 관계를 실감 나게 연출해 놓았다. 51㎡ 규모의 영상관은 지구의 콩팥인 습지, 낙동강 습지 이야기, 습지 친구들, 습지와 사람들을 시청각 자료로 제공함으로써 더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체험이 이루어지도록 꾸며 놓은 공간이다. 야외 공원은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공간이다. 전시관 내에서 다룰 수 없는 생태 관찰의 현장 학습을 제공하는 동시에 생태계에 대한 심화 학습의 기회도 제공한다. 이 야외 공원 안에는 수달 모형과 같은 포토존을 두기도 하고, 팔각정을 세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쪽으로 검암 습지와 상락대를 관찰할 수 있는 전망대를 설치해 두었다. 낙동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락대 중간, 아득한 절벽 위에는 낙암정洛巖亭이 서 있다.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거쳐 충청도의 관찰사를 지낸 배환 선생의 정자이다. 가는 길에 한 번 들러 보고 갈 만한 정자이다. 낙동강생태학습관에서 3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단호샌드파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설은 낙동강 수변의 넓은 백사장과 맑은 물을 활용해 인간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게 꾸민, 가족 단위 휴양 공간이다. 단호리 백사장에 조성된 이 단호샌드파크는 카라반 3대, 자동차 야영 사이트 2면, 글램핑장 2면, 텐트 야영장 8개소를 갖추고 있다. 이 시설들은 일정 요금을 지불하고 사용할 수 있다. 이 밖의 시설로는 어린이 놀이터, 트램펄린(방방뜀틀), 공동 세척장, 다목적 구장, 농구장과 부대시설이 있다. 단호샌드파크에서 더 보고 갈 곳은 이 파크 옆에 있는 낙강정洛江亭이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던 권예 선생의 정자이다. 하아그린파크는 2013년에 안동시 남후면 하아리에 청소년 수련 기관으로 설립하였다. 이 안에는 자연과 역사의 숨결 속에서 청소년들의 꿈을 키워주는 안동시청소년수련원이 들어 있다. 이 수련원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하회마을, 봉정사, 도산서원 등의 문화유산과 연계한 유교 문화 체험과 독립운동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다른 수련원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전통문화와 선조의 얼을 느낄 수 있는 학습의 장이다. 수련원의 주요 기능과 업무는 청소년 수련 활동 프로그램 운영 및 개발, 건강한 청소년 육성과 시민의 복리 증진을 위한 사업, 일반 단체의 수련 활동과 여가활동 사업, 대학생 학술답사 및 MT, OT 지원, 청소년과 일반 단체 숙박 지원 등이다. 수련원 안에는 196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 강의실, 야외 주차장, 야영장, 미니 체육 활동장, 천연 잔디 구장, 농구장, 다목적 구장(배구, 족구) 등의 체육 시설, 서바이벌 게임장, 모험 놀이 등의 놀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검암 습지 생태공원 가까이에 있으면서 이와 연계하여 관광 명소로 주목 받는 곳이 있다. 풍산읍 마애리에 조성된 마애솔숲문화공원과 마애선사유적전시관이다. 마애솔숲문화공원은 마애리 일대 4만5036㎡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공원이 자랑하는 볼거리로는 솔숲 복원의 길, 계절에 따라 피어나는 꽃들을 감상할 수 있는 초화원, 가족 단위로 즐길 수 있는 민속놀이장과 아유회장, 인근 전통 문화자원과 연계하여 여러 가지를 경험케 한 알림 마당, 바람의 언덕 등이다. 또 이곳에는 금강소나무 등 37종의 다양한 수목과 꽃, 잔디 등 15종의 초화류를 심어 관광객이 감상‧힐링할 수 있게 꾸며 놓았다. 마애선사문화유적지는 마애솔숲문화공원을 조성하던 2007년, 매장 문화재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는 낙동강 상류에 속하는 하안단구 지층으로, 야트막한 구릉의 말단부에 있으며, 안동 지역에서는 3~4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로 추정되는 유물이 처음으로 발견된 곳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석기는 주먹도끼(양면 핵석기), 찌르개(첨두기), 몸돌(석핵), 망치돌, 긁개, 찍개 등 380여 점이었다. 이 유물들은 안동 지역의 구석기 시대 문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보관하기 위해 지은 것이 마애선사유적전시관이다. 연면적 390.45㎡에 제1전시실, 제2전시실, 기획 전시실, 수장고, 관리 사무실 등으로 구성된 이 전시관은 2009년 11월에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1전시실에는 출토 지역의 모형, 선사 시대의 생활상, 주먹도끼 제작 과정, 석기의 종류와 용도, 제2전실에는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생활상, 기획 전시실에는 역사의 향기와 전통의 숨결이 살아 있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관광 명소 안내와 안동의 선사 유물 출토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마애솔숲문화공원은 마을을 감싸고도는 낙동강과 망천 절벽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경치와 어울림으로써 관광 자원으로서의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거두고 있다. 마애 마을은 그 자연적 경관도 뛰어나거니와 마을에 기억할 만한 문화재도 있다. 산수정과 마애리 비로자나불이 그것이다. 산수정山水亭은 성균관 직장, 영천군수를 지낸 호봉 이돈 선생이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후배 양성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광해군 연간에 지은 것이라 추정한다. 마애리 비로자나불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석조비로자나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는 불상으로서 9세기경에 만들어졌다. 팔각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은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다. 홀로 외떨어져 있을 때보다 어울림으로써 아름다워지는 것이 있다. 작고 하찮은 것도 무리를 이루면 힘을 얻게 되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낙동강자연생태공원을 이루는 하위 요소들을 홀로 놓고 보면 자칫 소홀히 취급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연계하면, 전체로 묶여 자신보다 큰 의미로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은 덧셈의 법칙이다.
두물머리 유장하게 흐르는 것이 강물이로되 호수는 흐르는 물을 잠시 가둔다. 요긴하게 쓰고자 잠시 가두었다가 다시 흘러 보내는 것인데 안동에는 이러한 큰 호수가 두 곳이나 있다.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강(洛江)과 영양 일월산에서 시작된 동강東江(반변천半邊川)의 물길은 각기 오랜 시간 따로 흐르다가 안동호와 임하호의 품에 안긴 후에야 비로써 하나가 된다. 안동 시내에서 용상동으로 넘어가는 법흥교 다리 아래가 양 방향의 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두물머리다. 이 때문에 안동의 두물머리는 낙동강의 본류며 시발지로 인식된다. 낙동공원에 이를 보여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폭 3.8m, 높이 1.9m의 화강암 표지석에는 ‘낙동강 시발지’라는 다섯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안동의 엣 지명인 영가도 두물머리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명칭이다. 영(永)자는 ‘이수(二水)의 합자이며 가(嘉)는 아름답다’는 의미다. 즉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지세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지명인데 이를 증명하듯 낙동강은 물산교류의 중심이었다. 남쪽으로부터 어류와 소금을 실은 거룻배가 강을 거슬러 안동을 지나 예안까지 이르러서 싣고 온 물건을 팔고, 내려갈 때는 이곳에서 생산한 물건을 싣고 갔다. 물산교역의 산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곳이 바로 두물머리고 낙동강이다. 임청각 임청각은 조선 중종 10년(1515)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낙강이 끝나고 두물머리가 시작되는 현재 자리에 99칸의 고택을 지었다. 이명은 우리나라 상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편을 저술한 행촌 이암의 후손이다. 굳이 연보를 따지자면 이암의 손자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이고 이원의 여섯째아들이 영산 현감 이증인데 이명은 바로 그의 3남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보면 505년 전이고 종법의 내력으로 보아도 이창수(55세) 종손이 벌써 21대째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임청각은 1942년 일제가 독립운동가의 정기를 끊어버리겠다며 마당 한가운데 중앙선 철길을 내고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강제로 철거한 탓에 철길과 고택이 붙어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중앙선 복선전철화 사업이 마무리되는 2020년쯤이면 철로가 임청각에서 6km 밖으로 옮겨진다. 이와 더불어 예산 280억 원을 들여 2025년까지 안동 임청각을 중앙선 철로가 놓이기 이전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임청각 주변에 있다 사라진 분가 3동을 다시 짓고 철도 부설 당시 허물어진 주변 지형과 수목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는 한편 석주기념관을 건립하고, 주차장, 화장실, 소방시설 등을 재정비할 계획이다. 임청각을 논하면서 반드시 짚어야할 3가지가 있다. 전술한 것처럼 이 집안에서 단군세기가 저술되었다는 것과 15대 종손 허주 이종악의 글씨와 그림이야기, 그리고 석주 이상룡과 이 집안사람들의 독립운동사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문재인대통령이 2019년 8.15광복절 경축사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귀감으로 임청각을 언급한 후 연이어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부겸 행자부 장관, 뒤이어 김현미 국토부장관과 김종진 문화재청장 등 여권의 핵심인물들이 모두 다녀가는 등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 바쳐 배운 자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임청각 정신은 이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혼으로 우뚝 섰다. 독립운동 석주 이상룡(1858~1932)은 고성이씨 임청각의 17대 종손이다.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1911년 1월5일 99칸의 임청각과 전답을 모두 팔고 52세에 전 가족을 데리고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서간도에서 석주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이회영과 함께 건립해 신교육에 앞장섰으며, 경학사를 만들고 한족회회장,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하다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아들인 이준형은 1942년 자결로 일제에 항거했다. 이준형의 아들이면서 석주에게는 손자와 손부가 되는 이병화와 허은 여사 역시 선대의 뜻에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허은 여사는 이육사의 어머니인 허길이 종고모가 되는 한말 대표적 의병장 왕산 허위, 허형 가문의 손녀이다 보니 독립운동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시댁 친정 모두 서간도로 망명을 온 탓이었다. 시할아버지 이상룡, 시아버지 이준형, 남편 이병화 선생의 독립운동에는 허은 여사의 뒷바라지가 있었다. 말년에 독립운동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를 출판했는데 독립투쟁 때 실생활들을 기록한 것이었다. 1915년부터 1932년까지 17년을 만주에서 서간도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아 임청각이 배출한 10번째 독립운동가가 되고 뒤이어 석주의 부인 김우락(1854~1933)여사까지 서훈되어 이 집안에서만 11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이종악 허주 이종악은 임청각 15대 종손이다. 호가 빈 배라는 뜻인데 우리시대의 유명한 정치인 김윤환의 허주라는 호의 연원이 실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적 재능이 뛰어나 토지와 세금제도를 궁구하는 한편 당시 풍조가 중국 역사에 치중하는 것을 보고 『동사분류휘편(東史分類彙編)』저술에 착수할 정도로 역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병법(兵法)과 진법(陳法)을 비롯하여 학식이 전 분야에 두루 미칠 만큼 박식했으나 1762년 사도세자의 참변이후 출사의 꿈을 완전히 접고 초야에 묻혀 문예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는 특히 해서 · 행서 · 예서 · 전서 등 모든 서체를 섭렵했는데 『난정첩(蘭亭帖)』, 『안진경필첩(顔眞卿筆帖)』, 『동파필적(東坡筆蹟)』, 『조한림필(趙翰林筆) · 조맹부필첩(趙孟頫筆帖)』, 『석봉서법(石峯書法)』, 『척주동해비첩(陟州東海碑帖)』 등 그의 애장본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중 그의 행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1766년 정박(鄭璞) 등 사우들과 시회를 개최하고 작성한 시첩인 『유희첩(遊戱帖)』이다. 예서의 대표작인 「사수선유록(泗水船遊錄)」은 1776년 4월 6일 허주가 18명의 사우들과 함께 사수(泗水)에서 선유(船遊)하고 남긴 제명록(題名錄)이다. 행초제의 대표작은 외증조인 조덕린(趙德隣)의 10조소(條疏)를 필사한 「허주부군수필(虛舟府君手筆)」이다. 하지만 역시 허주 글씨의 백미는 전서다. 전서의 종장인 허목의 대표작 「섭주동해비(陟州東海碑)」의 탁본을 교본으로 삼아 「사물잠(四勿箴)」과 「금명(琴銘)」 등에서 전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인각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300여개에 달하는 인장의 명문이 날인되어 있는 『허주인장(虛舟印章)』은 고려대학교 석주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허주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남달라 친족 간의 화목을 상징하는 <9세동거도九世同居圖>를 그리는 등 일찍부터 그림에 관심을 보였으나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 것은 1763년 4월 《허주부군산수유첩》에 있는 12폭의 선유도를 그린 이후다. 《허주부군산수유첩》은 낙동강 일대 12경승을 선유의 관점에서 그린 작품인데 선유를 시작한 날짜는 1763년 4월 4일이며, 이로부터 5일이 지난 4월 8월 반구정에서 선유를 마감했다. 화첩은 바로 이 5일간의 여정을 담은 것이다. 선유의 경로는 화첩의 순서와 다르게 동호해람東湖解纜 – 양정과범羊汀過帆 – 칠탄후선七灘候船 – 사수범주泗水泛舟 – 선창계람船倉繫纜 – 낙연모색落淵莫色 – 선사심진仙寺尋眞 – 망천귀도輞川歸棹 – 운정풍범雲亭風帆 – 이호정도伊湖停棹 – 선어반조鮮魚返照 – 반구관등伴鷗觀燈의 순이다. 음식절조와 탑동종택 음식디미방과 수운잡방, 온주법에 이어 안동지역에서 또 하나의 고조리서 음식절조가 발견되었다. 음식절조는 국가민속문화재 제185호인 고성이씨 탑동파의 종가집에서 150년 전 남성에 의해 한글로 기록된 희귀한 자료인데 후손인 이재업 경북유교문화원 이사장이 몇 해 전 우연히 선대 간서공(1798~1871)의 책 고리를 들춰보다가 한글 고어체로 된 이 책을 발견했다고 한다. 소장자인 이재업회장과 고성이씨 탑동파 문중에 따르면 이 책은 고성이씨 탑동파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음식조리법이라고 한다. 지질, 필적, 책 표지에 적힌 간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판단한 결과 음식절조는 간서공이 죽기 6년 전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조리법을 정리한 자료라는 것이다 이재업 이사장은 음식절조를 국문학자 안귀남 박사에게 국역 주해를 부탁, 지난 8월15일에 책이 발간되었다. 향후 포럼과 음식재연을 통해 음식절조에 담긴 다양한 음식들을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다. 1700년대에 지어진 탑동종택은 안채·사랑채·북정 등이 자연환경과 잘 조화된 사대부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집인데 현 소유자 이찬형(李贊衡)의 11대조인 이준식(李俊植)이 안채를 건립하고 이어 사랑채를 건축하던 중에 죽자, 그의 손자 이원미(李元美)가 완성했다. 대청의 북쪽에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는 북정(北亭)은 소유자의 7대조인 이종주(李宗周)가 1775년(영조 51)에 건립하였다. 1824년(순조 24년)에 대수리를 하였고, 1991년에는 안채의 정침을 고쳐지었다.
마애마을·소산마을·가일마을 마애마을은 ‘마애선사유적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마애솔숲공원’을 조성하던 중 2007년 4월, 이곳에서 주먹도끼, 찌르개 등 기원 전 3만~4만년쯤 구석기 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371점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 유물들을 보기 위하여 마애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마을에서 놀라운 절경과 마주했다. 그것은 ‘망천절벽’과 그 밑을 흐르는 강물이었다. “서리 묻은 단풍이 비단보다 붉은데/ 비온 물결이 쪽과 같이 푸르구나./ 두보의 곡강이 응당 멀지 않고/ 소동파의 적벽이 부끄럽지 않네.” 이 절경을 송암 권호문(1532 ~ 1587)은 이렇게 노래했다. 선사시대부터 이곳 주민들에게 젖줄이 되어 온 마애마을의 강물은 망천절벽 아래를 돌아 풍산들을 적시며 흐른다. 풍산들녘에는 안동김씨 집성촌인 소산마을과 안동권씨 집성촌인 가일마을이 있다. 안동김씨의 소산마을 입향조는 비안현감을 지낸 김삼근(1419~1465)이다. 그는 안동김씨 시조인 태사공 김선평의 대종손으로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김계권과 김계행이 그들이다. 김계권은 한성부 판관을 지냈고, 김계행은 대사간을 지냈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후 묵계에 은거하였다. 김계권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면서 지금의 청와대 일대인 장동에 터전을 잡고 살았는데, 다섯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세조조에 국사를 지낸 학조대사이고, 2남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영전, 3남은 진사 김영균, 4남은 수원부사를 지낸 김영추, 5남은 사헌부 장령을 지낸 김영수이다. 이 가운데서 왕비 3명, 정승 15명, 종묘배향 6명 등을 배출한 5남 영수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한 사람들은 모두 김영수의 후손이다. 소산마을은 김영수의 세 아들 중 장남 김영의 후손이 나중에 낙향하여 세거함으로써 안동김씨 오백 년 세거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 소산마을에서 우리는 경상북도 중요 민속자료 제99호인 양소당, 보물 제2050호인 청원루,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11호인 돈소당,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93호인 동야고택 등의 고택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인 삼구정,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72호인 태고정 등의 누정을 만날 수 있다. 이 가운데서 양소당은 안동김씨 대종택이고, 삼구정은 김계권의 아들 4형제가 대제학 제평공 권맹손의 딸인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정자로서 효의 상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청원루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영수였던 청음 김상헌(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됨)이 본향인 이곳 소산마을에 잠시 머물면서 그의 증조부 김번(김영수의 차남, 평양서윤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됨)이 지은 집을 증축한 것인데,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청원루’라 하였으며 충의 상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소산마을 입구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청음 김상헌의 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를 새긴 시비가 서 있다. 소산 마을을 지나 하회나 구담으로 가는 길의 오른쪽에 가일이란 마을이 있다. 영주군수를 역임한 권항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이 집성촌에 권주라는 이가 있었다. 권항의 손자로서 경상도관찰사, 도승지 등을 지냈다. 그런데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 그 약사발을 들고 갔다고 하여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으며, 그의 부인은 그 기별을 듣고 자결을 하였다. 후일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되었으나 이번에는 중종 조에 벼슬을 하던 권주의 둘째 아들 권전이 기묘사화 2년 뒤에 일어난 신사무옥 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권주의 장자인 권질은 안동 예안으로 유배되었다. 이 참혹한 변을 당한 집의 권질의 딸이 퇴계의 둘째 부인이다. 그러니까 이 마을은 퇴계의 처가 동네가 되는 셈이다. 퇴계의 둘째 부인 이야기 퇴계의 둘째 부인 권씨는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집안의 참극을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실성하더니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퇴계가 만년에 제자 이함형에게 준 편지에서 "그저 애써 잘 지내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십 수 년, 그 사이 더러 마음이 흔들리고 번민과 고뇌로 견디기 어려운 때도 없지는 않았네"라고 한 것은 불행한 아내로 인한 퇴계 자신의 불행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퇴계는 첫 번째 부인이 병사하고 난 후 3년 만에 재혼하였다. 그 경위는 이러하다.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권질이 어느 날 퇴계를 불러 놓고 딸로 하여금 차 대접을 시키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것은 저 실성하고 과년한 딸을 좀 맡아 달라는 것이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네 밖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네.” 퇴계는 오랫동안 침묵한 후 “네, 고맙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퇴계의 부인이 된 권씨는 퇴계의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다. 하루는 퇴계가 조회에 나가기 위해 도포를 입는데 헤어진 부분이 있는 것을 보고 부인에게 기워 달라고 하자 부인은 빨간 헝겊을 대어 기워 왔다. 퇴계가 그것을 입고 궁궐로 갔더니, 모두들 그것이 예법인 줄 알고 그 뒤로 도포에 빨간 헝겊을 대어 기워 입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제삿날 온 식구들이 큰집에 모여, 제사상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는데, 상 위에서 배가 하나 떨어졌다. 퇴계의 부인이 얼른 그것을 치마 속에 숨겼다. 이를 본 큰형수가 말했다. “이보게, 동서. 제사상을 차리는데 과일이 떨어진 것은 우리들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인데 그것을 왜 치마 속에 감추는가?” 이 소란에 퇴계가 나타나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퇴계는 큰형수에게 정중하게 말하였다. “형수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며느리의 잘못이니,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도 귀엽게 보시고 화를 내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퇴계의 말에 동서를 꾸짖던 큰형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하였다. “참으로 동서는 행복한 사람이야. 서방님 같이 좋은 분을 만났으니 말이야.” 퇴계는 아내를 불러 치마 속에 배를 숨긴 이유를 물다. 아내는 먹고 싶어 숨겼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 배의 껍질을 손수 깎아 아내의 입에 넣어 주었다. 풍산들이 낳은 풍산소작인회,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발판이 되다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벼의 물결이 바다를 이루는 풍산들의 풍요 뒤엔 수탈하는 자와 수탈당하는 자의 대립과 갈등이 숨어 있었다. 1923년 5월 1일에 이르면 그것이 표면화하여 안동지역 최초로 풍산소작인회의 결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풍산읍을 중심으로 약 삼천여 명이 군집하여 집회를 가진 이 소작인회는 권오설, 이용만, 이회승 등이 중심에 되어 소작료와 지세 등 현실적 문제를 제기하고, 농촌부인과 농민들의 교양교육과 소작대장의 작성, 농사개량과 부업장려 등의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러한 소작인회의 요구가 집단적인 쟁의로 발전하자 지주 측에서도 강력하게 대응하여 한인 지주들은 일본인들의 협조 하에 풍서농무회를 결성하고 소작인회를 압박하였다. 그들은 소작료를 높이고 불응하는 사람들에게서 소작권을 박탈하였으며 대항하는 사람들은 경찰에 고발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소작인회는 공동으로 품을 팔아서 그 돈으로 구금된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며 쟁의에 참여하여 토지를 경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벼를 거두어 부조하기도 하였다. 이 회오리 속에서 권오설(1897~1930)이란 인물은 풍산소작인회를 발판으로 하여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조선노농총동맹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는 조선노농총동맹을 이끌면서 1925년 2월 김찬, 김재봉, 김단야, 박헌영 등과 조선공산당 창당을 결의하였고, 동년 4월 조선공산당과 그 산하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가 창설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해 말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이때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들어오는 자금을 관리하며 조직을 총괄하는 한편, 6.10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는 만세시위 때 사용하기 위한 '격고문'과 그 밖의 전단 등을 직접 작성하였는데, 당시 그가 작성한 격고문을 보면, 총체적으로 식민지 민족을 무산자계급,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계급으로 규정하면서 민족적·정치적 해방과 계급적·경제적 해방을 동일한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분리된 것이 아닌 통일적인 것으로 파악한 그의 민족해방이론은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민족혁명을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하는 이론적 단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사 직전인 6월 7일 계획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0년 옥중에서 순국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날이 밝으면 이렇게 마애마을의 망천절벽 밑을 돌아 풍산들을 적시며 흐른 강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깨뜨려 논밭을 일구어 살게 한 이래 삼구정과 청원루를 지어 효와 충을 나타내는 문화를 낳게도 하고, 무산자계급의 해방을 통한 민족 해방의 횃불을 높이 들게도 했다. 날이 밝으면 이 강물 또한 새로이 흘러 이 유역을 새롭게 열어갈 것이다.